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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꿈틀대는 여름, 익숙한 곳을 떠나 새 힘을 길러낼 시간 [작가와의 대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8.20 18:09

수정 2024.08.20 18:25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 여행 가방이 노래부른다 ■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빗속 7월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조금 부산스러웠지만 지금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여행은 번개처럼 지나가고 오래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닌지요. 8월 여행이야말로 여름여행이지 않을까요.

여행은 무조건 즐거운 것이니까 여행하면 콧노래부터 나오는 것 아닐는지요. 그런데 극한폭염입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리듬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여행가방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요. 높은 선반 위에, 어두운 창고 속에 아니면 숨 쉬지 못하고 쟁여있는 물건들 속에 가슴 답답하게 숨 쉬지 못하고 누워있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아예 지난여름 여행이 끝나고 넣어둔 그대로 단 한 번도 그 가방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신지요.

아, 내가 너무 미련스럽게 말했나요. 어쩌면 당신은 이미 여름이 오기 전에 가방을 꺼내 바람과 햇살을 조금 먹이고 그리고 탈탈 먼지도 떨어서 눈에 보이는 곳에 잘 놓아두고 여름여행을 꿈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녹음의 계절을 지나는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는 폭염보다 뜨거운 것이 일궈지고 있지요. 그것은 가을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겠는지요

어쩌다 생각이 나면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루 하나씩 넣어두면서 벌써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곧 출발할 것이라고 여행의 준비는 지금 되어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거기서부터 여행이지요. 갈 곳을 정하고, 날짜를 정하고, 가방을 꺼내고 아니면 오래전 준비된 가방을 더 빠른 속도로 점검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가슴 뛰는 시간입니까.

여행은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메라를 준비하고 약과 화장품을 챙기고 그리고 옷을 수북이 꺼내놓고 가져갈 옷을 고르는 그 순간 여행은 오히려 절정이 아닌가 합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사실 절정은 아닐지 모릅니다. 마치 결혼식이 절정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결혼의 절정은 결혼식이 아니라 서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부모님을 만나고, 예물이 오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신혼여행지를 정하고, 돈을 내고, 여행가방을 챙기는 그 순간들일 것입니다. 결혼식장까지 오는 데 너무나 많은 감정과 마음 쓸 일들과 시간이 흘러가서 결혼식장까지 오는데 다 늙어버렸다는 신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준비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 일도 없다고 어떤 중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지만 바로 오늘 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는 새로운 일들을 만나지요.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은 두렵고도 감사한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하지는 않을까요. 다만 앞으로의 행운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지금 짙푸른 녹음의 계절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봐도 수북한 녹음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 같기도 합니다. 그 푸른 짐승은 도도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힘있는 계절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극한폭염의 뜨거운 계절이지요. 기온이 뜨거운 것 그 속에 우리들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라 더위라는 물리적인 방해꾼을 밀쳐내고 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일구어내는 농작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그 여름의 위대함이야말로 가을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겠는지요.

그 마음속 열정을 꺼내 짐을 챙겨보세요. 어디든 떠나야 하니까요. 푸른색 안경, 비키니… 그리고 시집 한권이 있다면 더 좋겠지요. 당신의 길에 이 계절의 찬미가 가득하기를

천마리의 새끼를 한꺼번에 낳았는지

살냄새가 진동하는 여름짐승

헐떡 헐떡

7월 지나 8월 낮

오를대로 오른 본능의 짙푸른 질주가

검푸르게 출렁거린다

초록이 무거워라 산벗 나무 잎 하나가

늙은 여자 하나를 쓰러트린다.

'여름산'이란 졸시의 한 부분입니다. 짙푸르게 검푸르게 익어가는 초록잎이 무거워 보이고, 힘찬 질주가 진행되고 있는 힘의 여름산을 읊은 한 부분입니다.

이 여름은 날씨의 온도를 뛰어넘어 그야말로 자신의 뜨거움으로 한 계절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더위, 폭우, 장마 그런 따위를 거론하지 말고 자신의 가슴속 열정을 여름보다 더 뜨겁게 높여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일에 땀 흘려야 하는 것이지요. 여름엔 나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땀 흘리는 경험을 쌓는 일이 바로 우주를 들어올리는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열정으로 당신의 가방을 지금 꺼내 보세요. 지난여름 다녀온 여행의 기억이 그 가방에 그대로 남아있기도 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다른 물건들에 짓눌려 있던 가방은 다시 활기를 찾고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여행은 소비가 아니라 경험이며 위로입니다. 시간과 사유를 함께 거느리며 낯선 경험에 자신을 즐기는 일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은총이 놀라운 방식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도 됩니다.

따라서 모든 물건들도 계절에 따라 순환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의 겨울 외투가 장롱 깊은 곳에 걸려 고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여행가방이 주인공입니다.
여름엔 어딘가로 떠나야 하지요. 그곳이 어디라도.

가능한 한 당신의 여행가방 속에 푸른색 안경과 비키니와 여권과 잠옷과 샌들과 잡다한 물건들 외에 반드시 필기도구와 메모를 할 수첩이 있기를. 그리고 빗속 여행을 떠나신 분들도 시집 한 권이 들어 있다면 가방의 노래는 더욱 맑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리듬이 그 방에 파도를 치며 바다를 먼저 듣게 하지는 않을까요. 그래요. 여름엔 지금 현주소를 떠나며 새로운 힘을 길러내야 하는 거지요. 당신의 여행에 여름의 풍성한 찬미를….

짐승처럼 꿈틀대는 여름, 익숙한 곳을 떠나 새 힘을 길러낼 시간 [작가와의 대화]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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