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업과 옛 신문광고

[기업과 옛 신문광고] 남양분유와 우량아 대회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8.29 18:21

수정 2024.08.29 18:21

[기업과 옛 신문광고] 남양분유와 우량아 대회
남양유업은 매일유업, 서울우유협동조합과 함께 3대 우유업체의 하나다. 2000여명의 종업원에 매출 규모가 1조원대를 오르내릴 만큼 큰 기업으로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평북 영변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를 나와 영변의 숭덕여자중에서 교사로 일했던 홍두영이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창업한 기업이다.

시가총액이 매일유업의 몇 곱절에 이를 정도로 탄탄하던 남양유업의 경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부터였다. 2013년 대리점 물량 밀어내기라는 '갑질'을 한 사실이 드러나 소비자 불매운동을 자초했다. 창업주의 장남인 홍원식 전 회장 외조카인 황하나씨의 마약 투약은 그러잖아도 나빠진 기업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21년 발효제품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억제 효과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발표를 해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결국 당시 홍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황하나씨 문제에 대해서도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홍 회장 일가는 퇴진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법정 다툼이 벌어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남양유업의 경영권은 올해 1월 사모펀드 한앤컴퍼니로 넘어갔다.

후손들의 일탈과는 달리 2010년 타계한 홍 창업주는 매우 청렴한 인물이었다. 남양상사라는 비료 수입회사를 경영하던 고인은 아기들이 젖도 충분히 먹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남양유업을 설립했다. 충남 천안에 공장을 지은 지 3년 만에 순수 국내 기술로 분유 생산에 성공했다. 생산 초기에 분유는 아플 때 조금씩 먹일 정도로 귀해 '금유'로 불렸다.

고인은 평소 "기업하는 사람은 기업만 바라봐야 하고 그것이 애국"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인이 생존했을 때 남양유업은 초우량·무차입 기업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구개발(R&D)에는 아낌없이 자금을 쓰면서도 고인은 사옥도 마련하지 않았다. "고인은 해어진 양말을 기워 신고, 낡은 구두 굽을 갈아 끼우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같이 일한 사원들은 전한다.

남양유업 하면 떠오르는 것은 1971년 시작된 우량아 선발대회다. 6∼24개월 된 아기들을 대상으로 몸무게와 영양 상태를 심사해 상을 준 대회였다. 남양유업은 우유보다 분유로 성장한 기업이다. 분유 판촉을 위해 기획된 대회였고, 실제로 제품 판매와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을 줬다. 배가 나오면 사장님 소리를 듣고, 뚱뚱하면 부자로 여겨지던 때였으니 우량아의 제1 기준은 몸무게였다. 그 밖에도 머리와 가슴둘레의 균형, 혈색, 근육과 골격의 발달, 치아 수 등도 꼼꼼히 살펴 선발했다고 한다.

수많은 아기들이 참여한 시도별 예선을 거쳐 서울에서 본선 대회가 열렸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열린 본선은 그대로 전파를 탔다. 첫 대회에는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석할 정도로 이목이 집중됐다. 우승자에게는 1년 치의 분유와 상금이 선물로 주어졌다. 수상한 아기는 청와대로 초청을 받기도 했고, 분유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76년 5월 4일자·사진). 우량아 선발대회 출신 유명인도 많다. 작곡가 겸 가수 주영훈씨, 바둑기사 이창호 9단, SBS 윤현진 아나운서 등이 우량아 선발대회에 출전했거나 입상했다고 한다. 대회는 1983년을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모유보다 우유나 분유가 좋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다는 이유였다. 그 대신 건강한 모유 수유아 선발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우량아 선발대회는 남양유업이 처음 연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1926년 열린 '어린이 건강 진찰 대회', 1933년 '건강아동 표창식'이 그런 것이다.
6·25전쟁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1953년부터 우량아 선발대회는 다시 열렸다. 어른은 굶어도 아이들은 잘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해 경주에서 최우량아로 뽑힌 9개월 남아는 체중이 9.75㎏이나 나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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