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칼럼일반

[인류학자 전경수의 세상속으로] 치장한 장모가 삼바를 배우러 가면 집안 살림은 사위의 몫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9.02 19:35

수정 2024.09.02 20:27

브라질의 처가살이

결혼후 남편 가족과 살던 한국도
30년 전부터 관행을 바꿔가는 중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현명함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장모와 함께 사는 펠리페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전경수 교수 제공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장모와 함께 사는 펠리페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전경수 교수 제공

살림살이와 생각은 변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문화의 주체이기 때문에, 문화는 변동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그러한 현상을 문화변동이라고 하여 별도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위적인 변화는 안 된다는 소리도 하지만, 변화란 본시 인위적이다. 문제는 그 방향과 속도에 있다. 관혼상제 중에서도 관례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상례도 상당히 축소되었다.
제례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 중심의 의례는 사라지고 산 자 중심의 의례만 성황이다. 세계관이 사자 중심으로부터 생자 중심으로 대체되고 있음도 드러난다. 엄청나게 내용이 변한 혼례도 가관이다. 가족이라는 현상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과정의 필연적인 결혼. 이것과 관련된 변화는 참으로 복잡하고 골치 아픈 사회문제가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비혼(非婚) 가족이라는 말까지 통용되고 있을까.

흔히 '리우데자네이루'로 불리는 도시에 가면 '히우'(강이란 뜻)라고 부른다. 범죄도시 2위라면 서러울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다. 빈부차의 결과다. 재래시장의 옷가게에서 배달 점원으로 살아가는 펠리페의 가족을 만나러 갔다. 브라질에서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유럽계와 인디오 그리고 아프리카계의 세 계통이 가계를 구성함에 어떠한 조합을 이루고 있는가에 따라서 명칭이 20여개로 갈라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이는 '모레노'는 유럽계와 인디오의 혈통으로 이어진 집단이다. 펠리페의 가계는 모레노에 속한다. 밀집한 서민 아파트의 입구에 공용의 철창 입구가 있고, 아이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26세의 펠리페는 아프리카계가 섞인 24세의 크리스티앙 사이에 어린 남매를 두었고, 52세의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방 두 칸의 서민 아파트에 거주하는 펠리페는 본시 빈민가 출신이었다. 크리스티앙과 만나서 결혼식도 없이 살림을 차렸고, 크리스티앙의 아버지는 가출한 지 오래되었다. 이른바 모중심가족의 비율이 높은 라틴아메리카 빈민촌이다. 펠리페의 출신지는 이 세상에서도 으뜸가는 빈민가라고 알려진 '도나 호싱야'(薔微村)다. 히우의 시가지와 코파카바나 해변 그리고 멀리 빠옹디아수카르(砂糖峯)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꼴꼬바도(Corcovado)'라고 불리는 예수상의 후면부 골짜기다. 그는 본가의 식구들에 비하면 많이 성공한 셈이다. 빈민들이 대를 이어서 살아가는 도나 호싱야를 탈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옆에는 아이들로 가득한 축구장에서 연신 공들이 이리 날고 저리 튄다. 어릴 때부터 공을 발에 달고 사는 남자아이들. 모든 것을 한 손에 거머쥐는 희망은 축구스타가 되는 길밖에 없다. 펠리페가 퇴근 후와 휴일에 함께 놀아주는 다섯 살의 아드리아노에게도 축구공이 전부다. 언제나 느긋한 펠리페가 섬뜩 긴장하는 순간은 장모의 호출이다. 나에게 눈웃음을 던지면서 "소그라(sogra·장모)!"라고 나지막이 얘기한다. 브라질의 서민들은 대부분 처거제(妻居制)로 살아간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처가살이를 말한다. 텔레비전 광고에서도 "소그라"라는 소리에 놀라는 사위의 모습이 등장하는 정도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카니발 중 삼바학교 무용수들이 춤을 추며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AP뉴시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카니발 중 삼바학교 무용수들이 춤을 추며 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AP뉴시스

장모인 마리아는 일주일에 세 번 화려한 무도복을 입고 삼바학교에 나간다. 부활절에 맞추어서 행하는 카니발에 출전할 수 있는 팀에 속하면 대박이다. 골목마다 삼바학교가 있을 정도다. 마리아가 속한 삼바학교가 예선을 통과하여 700m 길이의 삼바드롬으로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따게 되면, 그때부터 월급도 나온다. 그야말로 피나는 연습을 한다. 지구촌을 들썩이는 화려함의 이면에 가난의 슬픔도 안고 있는 것이 히우의 카니발이다. 장모의 삼바 연습에 지성으로 성원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요일은 더욱 바쁜 펠리페다. 삼바에 흥얼거리는 장모의 심기에 긴장하랴, 아이들과 축구공으로 놀아주랴, 몸치장에만 열중하는 크리스티앙 대신에 장보기도 하고 부엌일도 하고. 가족들이 다 참석하는 성당의 미사는 조는 시간이다. 크리스티앙의 아버지가 일찍이 사라진 점도 일말의 이해가 간다.

처가살이란 말은 어쩌다 들었던 것이지 일반적인 관행이 아니었다. "얼마나 못났으면 처가살이를 다 하나." 이런 말도 있었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부거제(夫居制)를 해왔다. 신혼부부가 남편의 본가에서 사는 방식이며, 신부 입장에서 보면 시집살이다. 그런데 한 30년 전부터 거주율(신혼부부가 거주지를 결정하는 규칙)에서 중대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딸네들이 친정 부모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모이는 유형이 등장했고, "딸이 있어야 노후가 편하다"는 말이 유행했다. 말을 바꾸면, 남자는 처가로 가까이 가고 있다. 처가살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했다. 부거제하의 처가살이라는 의미가 처거제로 향하고, 신혼부부는 당연히 부인의 본가로 들어가는 제도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관계에 개입된 권력이라는 현상을 생각하면 양자의 차이는 누구의 뿌리를 뽑느냐의 문제이고, 뽑힌 쪽이 불리한 인생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며느리가 뽑히면 시집살이가 되고, 사위가 뽑히면 처가살이가 된다.

2000년 전 '후한서 동이전'에 기록된 '서옥(壻屋·사위집)'이란 내용이 '서류부가(壻留婦家)'제라고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께서 풀이하셨다. 친영(親迎)을 기본으로 하는 한족들의 눈에 장가 드는 방식의 동이족이 기이하게 보였던 기록이다. 장가가는 방식이 선행의 전통으로 있었고, 조선 후기 이후 시집가는 방식으로 변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혈통원리에서 부계제를 유지하면서 거주율에서도 부거제를 하면, 가부장제의 기반인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로 간다. 부계혈통을 하면서 처거제를 취했던 동이족 선조들이 성별권력 관계의 균형을 유지했던 혜안을 보였다.

역사적 경험의 축적을 생각한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장가가는 방식에서 시집가는 방식으로 변했고, 이제 300년 만에 시계의 추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 과격한 페미니즘이 선동되었던 점도 반성해야 한다. 사회구조의 혈통원리는 부계제인데, 공계제(共系制)를 하는 서구식의 양성병행(兩姓竝行)을 주장하면 문제가 된다.

공계혈통을 따르는 브라질의 펠리페 가족과 보낸 3박4일이 나에게는 한국 가족의 역사적 문제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었다. 남이 나를 위한 거울이고, 제도는 변한다.
살기 위해서 변한다. 변화에 대한 저항의 과정도 있지만,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살기 위해서 변종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하물며 두개골이 1400㏄나 되는 사람인들 변하지 않을쏘냐! 변화를 생각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정에 불과하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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