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풍요 바탕으로 시·서·화 발달… 동시에 탐관오리 폐해 심해 [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9.09 18:22

수정 2024.09.09 20:03

국내 최대 곡창지대 품은 호남
충남·전남·전북 아우르는 평야
조선시대 쌀생산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엔 수탈정책 희생양
호남평야는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전북 지역에 집중돼 있다. 전북 김제 일대에 펼쳐진 호남평야. 이민부 교수 제공
호남평야는 차령산맥과 노령산맥 사이 전북 지역에 집중돼 있다. 전북 김제 일대에 펼쳐진 호남평야. 이민부 교수 제공

한반도를 대표하는 평야인 호남평야는 충남과 전북의 금강, 전북의 만경강, 동진강 유역을 포함한다. 지형적으로는 충남 차령산맥 이남에서 전북과 전남을 가르는 노령산맥 이북의 평야들이 연결된다. 행정상 지역 구분으로 호남평야는 전북에 한정되지만 지형적으로는 충남 금강 유역의 논산평야와 서천평야에서 전북을 중심으로 하고 남쪽의 전남 영광 해안 평야까지 포함한다. 남북의 길이는 대략 150㎞이며, 동서 간의 폭도 평야의 중심인 김제를 중심으로 약 50㎞에 달한다. 물론 전북이 단연 중심으로 전북 면적의 약 3분의 1이 호남평야에 속한다.

전북 김제를 중심으로 부안, 익산, 정읍 등이 호남평야의 중심이다.
이러한 관계로 호남평야의 핵심은 만경평야다. 때로는 임옥평야도 이름이 오른다. 노령 이남은 전남의 나주평야가 주축을 이룬다. 차령 이북의 평야로는 내포평야, 평택평야, 안성평야가 자리 잡으면서 경기도의 평야들과 연결된다.

호남평야의 지형적 구성은 △풍화와 침식을 많이 받은 낮고 완만한 기반암 구릉지 △홍수 시에 잠기는 하천 범람원 △해안의 갯벌 간척지 등이 결합돼 있다. 물론 한국의 다른 지역의 평야들도 그 구성이 유사하다. 호남의 구릉지는 비산비야(非山非野)로 불리면서 주로 평야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오랜 고을과 읍지들은 거의 이러한 낮은 풍화층 구릉지, 하천의 범람원과 개척지에 인접한 구릉지의 말단부에 자리 잡아왔다.

일반적으로 토양은 풍화가 많이 이뤄지면 붉은색 혹은 짙은 황색을 띤다. 암석에 포함된 금속 성분들이 산화해 만들어진 색이다. 암석의 금속물질은 일상의 금속과 마찬가지로 철, 알루미늄, 니켈, 마그네슘, 망간 등으로 구성된다. 물론 대표적인 것이 철이다. 색깔이 이러하다 보니 풍화토를 보통 '황토(黃土)'라고 부른다. 이러한 황토는 영어로 하면 적토(red soil)다.

호남은 지형적 특성으로 해안으로 갈수록 범람원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홍수가 나면 하천수가 밀물과 결합해 더러 범람원을 잠기게 한다. 따라서 하천변에 제방을 쌓아서 범람원이 홍수에도 잠기지 않게 하면서 넓은 평야가 확장해왔다. 또 오랜 시절 범람원을 간척해왔다. 개척 전의 전북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위치하는데, 금강 수운은 현재의 익산 금마면 일대까지 그리고 만경강은 왕궁 일대까지 들어왔음이 고고학 자료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개척과 개간으로 농경지가 넓어지면서 '옥야(沃野)'라는 별칭도 얻게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익산 용안현을 기록하면서 '옥야제해(沃野際海)', 즉 비옥한 평야가 바다에까지 이른다고 했다.

많은 저수지들은 하천 상류쪽 그리고 지류의 상류 등에 조성돼 왔다. 제방을 만든 후에는 홍수 시에 내린 비로 범람원에 물이 차면 이를 배수하는 장치도 만들어왔다.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호남평야의 주요 저수지와 제방들을 보면 김제의 벽골제(壁骨堤)와 대제(大堤), 익산의 황등제(黃登堤), 고부의 눌제(訥堤) 등이 있다. 벽골제와 황등제, 눌제는 당시 호남의 3대 제방으로 불렸다. 대체로 하천의 중류 혹은 중하류를 막아서 저수지를 만들었다. 단점으로 본다면 평탄한 지대여서 깊은 저수지를 만들지 못하니 수량 유지를 위해 넓은 면적의 긴 제방이 필요했다. 상류로부터 흘러온 토사들이 쌓이는 경우 주기적으로 굴착과 제거를 해야 했다. 이러한 저수지들은 일제강점기에 대대적 수리간척사업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벽골제는 AD 330년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것으로 당시 약 3㎞ 길이의 둑이었다. 벽골은 현재 김제의 통일신라시대 군현 이름으로 벼골에서 한자 음차로 벽골이 됐다는 설이 있다.

현재 익산 일원에서 유지되고 있는 농업용 저수지들은 이리 상도지, 낭산 저수지, 왕궁 저수지, 용화리 도순 저수지, 원수 저수지, 옥금 저수지, 웅포 송천제 등이 있고 소규모의 또 다른 많은 저수지들이 위치한다. 이러한 저수지들은 익산과 김제 등의 평야지대의 관개수로, 배수로와 연결돼 복잡한 수리체계를 이룬다.

아시다시피 서해안은 조차가 심하며 해안에 인접해 미립질의 물질로 이루어진 간석지가 넓게 분포한다. 해안의 평야, 범람원과 바로 이어져 있다. 간척 전만 해도 만조 시에 밀물은 하천을 따라 역류해 상당한 뻘물질을 하천변에 쌓았다. 호남평야 중심부에 땅을 파면 곳에 따라 뻘층이 나온다.

호남평야는 이러하듯 풍화구릉지, 하천범람원, 해안 간석지가 결합돼 만들어진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다. 이러한 풍요로운 평야의 산물을 바탕으로 시(詩), 서(書), 화(畵), 창(唱) 등의 문화예술이 크게 발달했다. 바둑도 압도적으로 호남에서 발달했다. 동시에 호남은 풍요한 물산을 중심으로 탐관오리의 폐해가 심했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내용이 다양하겠지만 동학혁명도 이러한 폐해가 큰 원인이다.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수탈정책은 호남평야의 농산물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일본으로 미곡을 유출하기 위한 군산항의 발달, 철도 운송을 위한 이리역 설치 등은 모두 호남평야 수탈정책의 일환이다. 다수의 대규모 저수지를 만든 것도 그러하다. 일제시대 이러한 연유로 이리 지명이 새로이 등장했다.

조선시대에도 있어 왔지만 일제강점기에 소작농의 어려움은 엄청났다. 그 대가로 호남평야의 해안가에는 염전이 있어 소금농까지 전개되고, 경제력을 높여 주었던 것이다. 과거 조선시대 국가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고 평탄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그중에서도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1960년대 경제개발이 전개되면서 한국은 농경지 개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해방 이후 북한 이주민 상당수는 호남평야로 와서 갯벌을 간척해 개척촌을 이루었다. 김제와 군산, 익산 등 호남평야에 다수 집중했다. 김제군 광활면, 부안군 계화면, 군산시 오구읍, 회현면이 대표적이다.

쌀농사 지역으로 교육에도 열정을 보이면서 이곳에선 많은 인재가 나왔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삶이 어려운 많은 백성들이 만주, 연해주로, 나아가 하와이와 멕시코 등으로도 이주했다. 이러한 경제적 이주는 독립운동을 위한 이주와 겹치기도 했다.
오늘날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쌀농사는 우리 한민족 교민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풍요 바탕으로 시·서·화 발달… 동시에 탐관오리 폐해 심해 [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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