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도 매년 어김없이 등장하는 막장 드라마가 있다. '막말 또 막말' '저질국감 재연' '여야 볼썽사나운 네탓 공방'. 지난 2015년 9월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때 어느 종합일간지들의 기사 제목이다.
이건 새발의 피다. '무더기 증인 신청' '고압국감' '호통국감' 등 비슷한 제목의 기사들이 매년 국감 시즌이면 거의 모든 신문을 도배하곤 한다. 국감제도는 1948년 대통령제 정부 수립 때부터 도입됐다. 중간에 폐지됐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여곡절 끝에 부활됐지만 매년 국감 때마다 국회의원은 '슈퍼 갑(甲)', 피감기관과 공무원들은 늘 '고양이 앞에 쥐' 신세였다. 우리의 국감은 미국식 청문회 제도와 영국식 국정조사가 뒤섞였는데 매년 9월 정기국회(100일간) 내 약 한 달간 집중 진행되는 건 세계에서 우리가 유일하다고 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5대 국회 국감 당시 '호통 정치인'으로 유명한 한 야당 중진의원이 있었다. 그는 피감기관을 상대로 방만·부실 운영을 따지던 중 관련 수치와 맥락이 어긋나자 본인도 순간 겸연쩍어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대뜸 담당 공무원을 불러 일으켜 세우더니 불호령을 내리며 말 그대로 십자포화를 날렸다. 호출당한 담당 공무원은 영문도 모른 채 쩔쩔매면서 연신 의원의 눈치만 봤다. 험악한 분위기에 주눅 든 공무원은 그 나름의 답변을 하려 했지만 또다시 이어지는 의원의 호통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당시 누가 봐도 의원 질의에 문제가 있었지만, 해당 의원은 험악한 분위기 연출로 본인의 무지를 덮은 셈이다. 이런 일은 과거에 비일비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감의 장점은 분명하다. 정부의 1년간 국정운영 농사에 대한 허와 실을 따져 국정 집행의 효율을 높이고, 잘못된 전철은 되풀이하지 말자는 게 주목적이다. 정부의 부실·방만 운영을 최소화해 국민 삶의 질을 높이자는 거다. 하지만 최근 22대 국회 첫 국감의 민낯은 입법부의 과도한 통제권 남용으로 드러났다. 행정부 견제라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특히 입법권력을 장악한 거대 야당은 견제와 통제 수준을 넘어 행정부를 쥐락펴락하기 일쑤다. 걸핏하면 증인·참고인이 마음에 안 든다며 '국회모욕죄'로 고발했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방탄과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겨냥한 공세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내 다수당이라는 입법권력을 총동원했다. 소수 여당인 국민의힘도 거야의 김 여사 의혹 파상공세를 막는 데 치중하느라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신성해야 할 국감장은 시정잡배나 내뱉을 만한 반말에다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난장판으로 전락했다. 특정 직업군을 폄훼하거나 피감기관과 여야 의원 간 고성과 막말도 오갔다. 일부 여야 의원의 과도한 '충성경쟁'은 눈꼴사나울 정도다.
가뜩이나 실물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주요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하루 종일 질문 한 번 안 하고 돌려보내기도 다반사였다. 1998년 이후 매년 국감을 평가해온 국정감사NGO모니터단은 올해 첫 국감 성적표를 최악 수준인 '평점 D-'로 매겼다. 지금 대한민국은 안보와 경제, 외교 면에서 매우 엄중한 상황이다. 당리당략만 있고 민생은 설 자리가 없는 국감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여야 의원들은 입만 열면 "국민이 보고 있어요"를 달고 산다. 당장 이 말을 되돌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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