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에도 이대로 안된다
과감한 투자 빛의 속도전
삼성위기 넘을 자산으로
과감한 투자 빛의 속도전
삼성위기 넘을 자산으로
삼성에서 반도체에 먼저 눈을 뜬 이는 30대 초반의 이건희다. 당시 그는 동양방송 이사였다. 해외 최신 테크 정보에 밝았던 그는 1974년 파산 위기 직전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 TV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 제품이 말이 되느냐는 주변의 강한 반대에 결국 사재를 털어 회사 지분을 샀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구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개인사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썼다.
매주 일본으로 날아가 반도체 전문가들을 만나 기술을 익혔지만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부도 위기도 여러 번이었다. 지켜만 보고 있던 부친 이병철 창업회장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1982년 미국을 방문하면서였다. 이 회장은 실리콘밸리 테크 공장들을 직접 둘러보고 결심을 한다. "반도체를 내 마지막 사업으로 삼겠다." 그가 자서전('호암자전')에서 밝혔듯이 '74세의 크나큰 결단'이었다.
돌아와 부지를 찾고 인재 확보를 서둘렀다. 다시 실리콘밸리에 급파한 출장팀의 보고서는 사업에 날개를 달아준다. "기술개발만 적기에 이뤄지면 이익은 천문학적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게 골자였다. 확신이 선 이 회장이 1983년 2월 8일 아침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삼성의 발표에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은 기업은 미국 인텔이다.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까지 만들어 돌렸다. 현실은 우리가 보았듯 다르게 흘러간다. 기공식 후 6개월 만에 기흥 공장을 완공하고 일본이 6년이나 걸려 개발한 64K D램도 6개월 만에 개발을 끝냈다. 삼성의 반도체 기적은 그게 시작이었다.
부친을 이은 이건희 선대 회장의 반도체 집념은 더 타올랐다. 세계 초일류 기업 포부를 밝히고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그는 에세이에서 특히나 1992년을 돌아보며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회고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 그해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전자매장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구석에 처박힌 삼성 제품을 본 것은 1993년 새해 벽두의 일이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잘해보자고 할 때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있다." 이 결의가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그 유명한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이건희 회장의 "이대로 안 된다"는 삼성이 확고한 1등을 꿰찼을 때도 계속됐다. 스마트폰이 막 나왔던 2007년 그는 "2010년이면 예측불허의 시대가 된다. 디자인, 마케팅, 연구개발이 확 달라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2010년이 되자 전년도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으면서도 내놓은 메시지가 "앞으로 10년 내 삼성 대표 제품이 대부분 사라질 수 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였다.
돌아보면 삼성은 이 회장이 별세 전 병상에 있던 2014~2020년 세계 최강 테크기업의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인공지능(AI) 시장이 오랜 겨울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미리 보지 못하고 모바일 생태계에 머물렀던 것이 뼈아프다. 과감한 투자, 괴물 같은 속도전이 길을 잃었다. 지금 삼성 반도체 위기의 본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최근 삼성의 경기 화성 반도체 사업장을 들렀다. 천장에 매달린 자동화설비기계(OHT)가 초당 5m를 내달리며 웨이퍼를 옮기고 있었다. 그 뒤 벽면에 '2.8 도쿄 선언' 후 만들어진 '반도체인의 신조'가 확 눈에 들어왔다.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큰 목표를 가져라,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져라,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 등 10가지다. 이 구호가 삼성의 신화를 만들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삼성은 이를 새롭게 바꾸는 작업도 이제 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희 정신은 살리면서 이건희 시대를 뛰어넘을 것. 세상을 다시 놀라게 할 비장의 승부수를 기대한다.
jins@fnnews.com 논설위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