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매년 9월 정기국회때마다 국정감사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헤드라인은 '국감을 앞두고 재계가 벌벌 떨고 있다'는 문구였다. 국감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항상 재계 총수나 CEO(최고경영자)들이 거론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 '분초'를 다투며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몸부림은 사실상 안중에 없는 행태로, 반드시 근절되야 할 국감의 악습 중 하나로 꼽힌다.
■올해 국감 기업 증인 159명
10일 정치권에 따르면 22대 국회 첫 국감에서 채택된 일반증인은 510명으로 집계됐다. 피감기관장과 같이 고정적으로 나오는 기관증이과 달리 일반증인은 각 상임원회가 특정 사안에 대한 질의를 위해 채택한다. 올해 국감에서 채택된 일반증인 510명은 최근 10년 새 채택된 일반증인 가운데 최다 규모다.
일반증인 채택 규모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기업인 증인도 증가했다. 지난 2020년 63명이던 기업인 증인은 2021년 92명, 2022년 144명, 2023년 95명을 거쳐 올해 159명으로 급증했다. 올해 국감에서 유일한 총수급 증인으로는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채택됐으나 결국 국감 전날 증인 명단에서 이름이 빠졌다.
국감에서 재계 총수들을 비롯한 기업인을 증인으로 부르는 관행은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1988년 통일민주당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의 정경유착 비리를 규명하기 위한 국감에서 맹활약하면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특히 야당측 증인으로 나온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칼 든 강도한테 (돈을) 빼앗겼다"는 증언을 이끌어내며 전국구 의원으로 떠올랐다.
정경유착 비리를 파헤치거나 기업의 각종 문제점을 파헤쳐 세상에 알리는 순기능에도 최근 국감에서는 단순히 기업인을 망신주기 위한 증인 채택 사례가 늘면서 구태로 지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증인으로 국감에 불러놓고 질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귀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올해 역시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국감에서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을 둘러싼 여야간 공방이 지속되면서 증인으로 나온 글로벌 IT 기업인 상당수가 질문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안철현 애플코리아 부사장이 출석 7시간 만에 질문을 받고 쓴 답변 시간은 3분 40초에 불과했다.
하상응 경실련 정치개혁위원장은 "무리한 증인 선정으로 인해 의사일정이 파행되기도 하고, 무더기로 증인을 소환해서 별다른 질문 없이 국정 감사를 종료하는 경우도 있다"며 "사후처리와 모니터링을 위한 제도 구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총수 출석 막아라…대관 존재 이유
국감 시즌이 오면 기업에서 가장 바쁜 곳은 대관부서다. 대관부서는 국회를 비롯해 정부 부처, 검찰·경찰 등의 사정기관을 대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응책을 마련한다. 과거 가장 유명했던 대관조직이 삼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던 미래전략실로 해체 전까지 삼성 전 계열사의 대관업무를 총괄했다.
대관부서의 핵심 임무는 총수의 국감 출석을 막는 일이다. 총수가 증인으로 채택되기 전 명단에서 이름을 빼든가 증인으로 채택되더라도 각종 사유를 들어 국감장에 출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 기업인들이 국감장에 나오지 않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업무상 해외 출장이다. 해외 출장이 먹히지 않으면 다음으로는 건강상 이유가 뒤따른다.
국감에서 기업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총수는 물론 CEO가 증인으로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당한 사유 없이 단순이 기업을 망신주기 위해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 문제다. 올해 국감에서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그룹 총수들이 증인으로 신청됐지만 최종 명단에서는 빠졌다. 한 대기업 대관임원은 "재계 총수들의 경우 국감 시즌만 되면 큰 관련성이 없는 상임위에서 증인으로 채택해 부르려는 시도가 허다하다"며 "의원실을 돌며 전후관계를 제대로 설명하며 설득시키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고 고충을 설명했다.
대관업무를 대하는 기업의 태도가 평가되는 시기도 국감이다. 주요 그룹은 물론 정부의 규제 산업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들은 대체적으로 대관조직이 잘 갖춰져 있다. 반면 스타트업에서 시작해 대기업 반열에 오른 기업들은 대관업무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지난 2018년 네이버와 카카오는 각각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와 김범수 경영쇄신위원장이 국감장에 선 이후 부랴부랴 대관업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대기업 대관임원은 "대체적으로 기업에 자료를 요구하거나 실무자를 불러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꼭 총수나 CEO를 불러서 국감장에 서게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며 "기업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나 오해 등이 무리한 출석 요구로 이어지는 사례가 다수"라고 토로했다.
syj@fnnews.com 서영준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