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0주년을 맞은 서울지하철 개통으로 한국은 21번째로 지하철을 가진 국가가 됐다(조선일보 1974년 8월 17일자·사진). 시민 탑승은 개통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첫날 호기심에서 타 본 사람들까지 45만명이 이용했다. 어지러울까봐 멀미약까지 먹고 온 승객도 있었다. 광복절이었던 개통일에 국가적 축제를 벌여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58년이다. 최초 계획 당시의 그림을 보면 현재와 다르다. 서울역~숭례문~시청~동대문~경마장~청량리역으로 역이 적었고, 청계천으로 지나가게 돼 있는데 아마도 일부는 지상구간이었던 듯하다. 경마장은 예전에 신설동에 있었다. 1960년에는 지하철과 더불어 서울~인천 간 철도를 복선화해서 전철로 바꾸기로 하고 관련 예산을 책정했다.그러나 기술력과 자본 부족 등으로 착공은 계속 미뤄졌다. 건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65년 한일 수교가 계기가 됐다.
한국 정부는 지하철 건설 기술이 앞선 일본 기업들과 교섭에 나섰다. 한일 간에 합의된 10개 협력사업 가운데 서울지하철과 서울~인천 철도 전철화 계획이 들어 있다. 같은 해에 1호선 외에도 다른 4개 노선 건설도 서울 도시계획위원회에서 계획안을 통과시키고 독일에 차관을 요청한 것으로 돼 있다.
인구 집중과 교통난 심화로 지하철 건설은 시급했지만 예산이 문제였다. 정치권에서는 비용이 적게 들고 공사 기간도 짧은 모노레일을 건설하자는 말도 나왔다. 1966년부터 기본조사 계획을 시작해서 1호선은 5년 안에 완공할 방침을 세웠다. 2~4호선도 동시에 추진했다. 그러나 탁상공론만 이어지고 진행은 더디기만 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도 지하철에서만큼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하철건설본부를 설치하고 38세의 김명년씨를 본부장으로 임명, 공사에 실질적으로 착수한 것은 1970년 6월이었다. 그 전에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발생, 김현옥 시장이 물러나고 서울시장은 양택식으로 바뀌었다. 설계와 공사 기술이 모자라 일본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미국에서 일하던 한국인 설계 전문가를 불러 조언도 들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온 일본 지하철 건설 권위자는 "도쿄대가 서울대에 졌다"고 농담을 하면서 생각보다 우리 기술이 발전해 있음을 인정했다.
공사 시작일은 1971년 4월 12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착공식에 참석해 땅에 파일을 박는 스위치를 눌렀다. 그날 밤 시민회관에서는 구봉서, 이미자 등 연예인 30여명이 출연한 착공 축하 쇼가 펼쳐졌고 남산에서는 불꽃놀이도 벌어졌다. 착공까지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공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돼 3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건설비는 외국의 절반 정도만 들었다. 도로를 따라 건설했기에 철도와 만나는 지점인 갈월동 굴다리와 청량리 근처 말고는 보상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1호선이 완공되고 곧바로 다음 노선을 추진했다. 애초에 강북 중심으로 그려졌던 노선도는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크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2호선은 왕십리에서 을지로를 거쳐 마포로 연결되고, 3호선은 불광동에서 서대문과 서울역을 거쳐 퇴계로로 들어가 미아동으로 이어지게 돼 있었다. 2호선을 강남 순환선으로 만들고 3호선이 강남을 관통하는 노선으로 바뀐 것은 1970년대 말의 일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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