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해프닝이 한국 국민뿐 아니라 세계인들마저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특히 K팝과 K드라마에 열광했던 K컬처 팬들의 놀라움이 커 보인다. 지난 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들: 민주주의에 가해진 충격이 한국의 양면을 드러냈다'라는 긴 제목의 기사를 송출했다. 가디언은 이 기사에서 "한국은 최근 몇 년간 '소프트 파워' 패권을 둘러싼 국제적 경쟁에서 분명한 승자였다"면서 "그런데 난데없이 벌어진 계엄 사태로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여기에 불쑥 끼어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한류 열기와 최근의 혼란상 간의 가장 극적인 대비는 군용 헬기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와중에도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군인들에게 맞서는 현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타전했다.
이런 낯선 풍경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앞두고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기자회견장에서도 연출됐다. 한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발표 이후 처음 열린 이번 기자회견에선 계엄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소년이 온다'가 비상계엄이 발동된 1980년 광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다. 한 작가는 관련 질문을 받고 "2024년에 다시 계엄 상황이 전개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바라건대 무력이나 강압으로 통제하는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젊은 군인들의 (소극적인 움직임과) 태도가 인상 깊었다"며 "(그들의 그런 행동은) 명령을 내린 사람들 입장에선 소극적인 것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한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맞춰졌다며 기뻐했다. 최근 4~5년 사이 과연 이런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 문화는 승승장구했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상 최우수작품상 등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과 배우 이정재는 세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또 방탄소년단(BTS)은 '다이나마이트' '버터' '퍼미션 투 댄스' 같은 노래로 연이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고, '클래식계의 젊은 거장' 임윤찬은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상인 그라모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한강의 이름이 호명됐다. 한데 이번 사태로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렸던 금자탑이 일거에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한 작가는 한없는 절망 속에서도 언어(문화예술)의 미래를 낙관했다. 한국 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묻는 외신 기자들의 질문에 "언어에는 강압적으로 그걸 눌러서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해도 잘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 그런 언어의 힘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면서다. 시상식장을 찾은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도 비슷한 말을 전했다. 한국 기자들과 만난 그는 "문학 밖의 일들에 대해 (나는) 뛰어난 통찰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몸을 낮추면서도, "어둠 속에 있을 때 더 밝은 빛을 찾아낼 수 있다. 저녁이 지나면 반드시 아침이 오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말로 오히려 한국민을 위로했다.
10일 밤 열린 노벨 문학상 시상식에서 특별연설을 한 스웨덴 한림원 종신회원이자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이기도 한 스웨덴 소설가 엘렌 맛손도 K문학의 힘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는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를 보며 개인적으론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모습에서 희망을 느꼈다"면서 "노벨 문학상이 정치적인 상은 아니지만 한강의 글은 정치적 경험과 역사를 다룬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문학은 강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희망하건대 한강의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에 큰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어수선한 시기에 그나마 기쁜 일이 되어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하루속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희망한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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