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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 칼럼] 수출마저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12.16 19:23

수정 2024.12.16 19:39

축포없는 사상 최대 실적
증가세 꺾이고 전망 암울
난국에 한심한 4류 정치
논설위원
논설위원
폐허의 땅에도 수출 무역선의 뱃고동이 울렸다. 1948년 2월 화신무역이 빌린 낡은 화물선 앵도환(櫻桃丸)이 부산항에서 출발해 홍콩 빅토리아 부두로 향했다. 이 행로가 한국 수출의 첫걸음이다. 당시 앵도환에 실린 물품은 한천과 건어물이 전부였다. 상인들은 각지에서 소달구지로 옮겨와 다시 큼지막한 그물망에 담은 뒤 배에 실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무역협회, 무역연감).

수출다운 수출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다.
'잘 살아보세' 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지고 박정희 정부가 매달 수출진흥대책회의를 열던 그 시절이다. 당시 주력 수출품은 다름 아닌 가발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엿장수에게 팔거나 직접 가발공장에 팔았다. 다시 그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탈색해 새로운 모발로 엮은 이는 또 다른 젊은 여자들이다.

스무 살 남짓 여공들이 한 줌씩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걸고 하루 12시간 일을 했다. 1964년 1억달러 수출의 숨은 공신이 그들이다. 가발 수출로 번 돈이 외화의 20%였다. 여공의 아버지들은 중동 사막 바람과 싸우며 오일달러를 보냈다. 거기서 길을 낼 때 시작된 수출이 시멘트다.

1억달러 수출은 10여년 만인 1977년 100배로 불어난다. 바야흐로 '팔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팔겠다'는 종합무역상사가 수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쑤시개부터 미사일까지, 바늘부터 선박까지 가리지 않았던 이들이 상사맨이다. 국내 첫 종합상사 삼성물산이 팔았던 최초 제품이 이쑤시개와 비누였다. 상사 공개채용 공고엔 정장을 차려입고 007가방을 든 남자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아래에 서 있는 사진이 들어갔다. 세상에 못할 건 없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상사맨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세계의 오지, 때로는 사지(死地)까지 들어가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내는 게 일이었다.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를 뚫고 군부를 만나 무기를 팔았고, 리비아 사막에서 난로를 판 일화 등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널려 있다. 탄탄한 정보력, 기발한 상상력으로 수출의 첨병 역할을 한 것이다. 1980년대 수출의 30%, 1990년대 수출 절반을 상사맨들이 해냈다.

정보화, IT 혁명기 수출 목록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세계를 석권한 글로벌 1등 한국 제품이 쏟아진 결과다. 반도체, 선박이 먼저 선두 일본의 산을 넘었고 이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이 시장을 압도했다. 자동차, 석유화학의 공습도 매서웠다. 2000년대 접어들자 이들 6개 품목이 전체 수출의 60%에 이른다.

기업들은 상사맨들이 간신히 뚫었던 척박한 지역까지 직접 인력을 보내 수출영토를 넓혔다. 지금 전성기를 맞은 한국 라면의 성공도 이에 해당한다. 웬만한 도시뿐만 아니라 스위스 알프스 융프라우 꼭대기, 남미 최남단 칠레 푼타아레나스까지 농심의 신라면은 히트상품이 됐다. 가난했던 시절 꿀꿀이죽 대체재로 만든 라면을 세계인의 놀이로 끌어올렸다. 라면 선구자들이 개척한 길 위로 김밥, 떡볶이가 이제 달린다. 세계 6위의 6000억달러대 수출국, 1조달러대 무역대국은 그런 노력 끝에 얻은 위치다.

지금 한국 수출의 견인차는 반도체와 자동차다. 70여년 전 앵도환에 실어보낸 건어물과 비교가 안된다. 반도체·차 '쌍끌이'로 올해 수출은 2년 전 기록을 넘어 사상 최대가 확실하다. 하지만 이를 자축하는 축포는 찾기 힘들다. 하반기 들어 수출 증가세는 확연히 꺾였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관세 압박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재앙급이 될 수 있다.

지난 5일 열린 무역의날 61주년 기념식에 윤석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틀 전 발발한 비상계엄 사태가 없었다면 대통령은 직접 무역인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정부의 강력한 지지를 천명했을 것이다. 상상도 못한 계엄과 8년 만의 탄핵, 여야 할 것 없는 사생결단 정치권의 권력 쟁투. 이 후진적인 작태가 여공과 상사맨, 기업들이 쌓아 올린 한국 수출탑을 갉아먹는다.
수출마저 위태로운데 정치는 여전히 4류다.

jins@fnnews.com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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