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30년 전과 달라진 K집회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12.29 19:12

수정 2024.12.29 19:12

정명진 문화스포츠부장
정명진 문화스포츠부장

"탄핵해 탄핵해~." K팝 응원봉을 든 MZ세대들이 블랙핑크 로제의 노래 '아파트'를 개사해 구호를 외쳤다. 국민체조를 개사한 탄핵체조를 함께하며, '전국 만두 협회'나 '빡친 고양이 집사 연맹' 같은 위트 있는 깃발을 들었다. 과거의 격렬한 충돌과 구호가 아닌, 유머와 문화로 무장한 평화로운 저항이 탄생한 것이다.

1980~1990년대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집회는 2024년 K팝 응원봉의 물결로 변모했다. 이것이 바로 2024년 우리가 목격한 'K집회'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시위문화는 어떻게 이토록 극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을까.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 건국대 사태에서 1295명, 김영삼 정권의 연세대 사태에서 462명이 구속된 바 있다. 하지만 올해 20만명이 모인 여의도 집회에서는 단 한 명의 구속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한국 사회의 문화적 DNA가 만들어낸 진화의 결과다.

본인의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고 이민화 교수는 당시 4차 산업혁명에 대해 강의하면서 '결국 일과 놀이가 결합되는 사회,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가 융합하는 호모 파덴스(Homo Fadens)의 사회가 4차 산업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신바람'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뭔가 해내려는 강한 성취욕과 함께, 흥이 날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열정을 쏟아붓는 민족이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열기나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 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한국인들은 '신나게' 만들어주면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바람 문화가 21세기 민주주의 운동과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문화가 탄생했다. 과거의 격렬한 충돌과 대립 구도는 이제 축제적 분위기와 문화적 창의성으로 대체됐다. 이는 우리 사회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호모 파덴스의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모 파덴스는 일(Faber)과 놀이(Ludens)가 융합된 새로운 인간상을 의미한다. K집회는 바로 이러한 융합의 대표적 사례다. 정치적 의사표현이라는 진지한 '일'과 축제적 분위기라는 '놀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한국인들은 대통령 축출과 같은 심각한 대의를 위한 시위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낙관적이며 카니발 같은 분위기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시민들의 자발적 연대다. '우리'라는 동료의식과 '정'이라는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해외 유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서로를 돌보며 집회에 참여했다. 선결제로 음식과 음료를 지원하고, 핫팩과 담요를 나누는 모습은 한국인의 공동체 정신이 현대적으로 승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GDP 중심의 산업사회에서 GHI(Gross Happy Index) 중심의 4차 산업사회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행복을 잘 추구하고 서로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는 사회, 바로 K집회는 이러한 새로운 사회상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과거 민주화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과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평화로운 저항이 가능해졌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거리가 K팝이 울려 퍼지는 축제의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흘린 피와 땀 덕분이다.


이제 K집회는 더 이상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K팝이 전 세계의 문화를 바꾸었듯이, K집회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실천 모델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폭력과 대립의 시대에서 축제와 화합의 시대로. 이것이 바로 K집회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이다.

pompom@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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