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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대통령의 권력은 설득력에서 나온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1.01 19:18

수정 2025.01.01 20:35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백악관 집무실, '오벌 오피스'에서 새벽 한두 시까지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 클린턴은 야심한 시간까지 오벌 오피스에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증언에 따르면 클린턴은 밤늦은 시간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주요 여야 정치인을 상대로 행정부가 발의한 법안을 지지해 줄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한국과 같이 미국도 대통령이 주도해 법안을 발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실제로 법제화되기까지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법안은 의회의 복잡한 심의 과정을 통과해 법제화되는 경우가 많다.
야구의 타자에 비유하자면, 미국 대통령은 꽤 높은 '타율'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대통령이 준수한 타율을 기록하는 이유는 대통령의 소속 정당, 즉 여당이 미국 의회를 장악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데이비드 메이휴 예일대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확률은 '여소야대'일 때나 '여대야소'일 때나 별 차이가 없다. 미국은 상향식 공천이 정착되어서 국회의원이 대통령이나 정당 지도자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지역구 이익 위주로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주도하는 법안을 법률화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통령학의 대가 리처드 뉴스타트 교수는 그의 저서 '대통령의 권력(Presidential Power)'에서 대통령의 힘은 헌법에서 부여받은 공권력이 아니라, '설득력(power of persuasion)'에서 나온다고 설파했다. 미국 대통령의 타율은 이러한 설득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탁월한 소통 능력이 있던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도 상당히 높은 타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시도했던 '도어스테핑'은 국민과의 소통 차원에서 상당히 신선한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몇몇 기자와 갈등을 빚자 그런 소통의 노력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국회와의 소통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는 거대 야당과 대화를 모색하고 정치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지난한 과제일 수 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수 있고, 공권력을 동원해 본인의 의사를 관철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력에 의존한 강성권력, '하드파워'의 리더십은 쉽게 한계에 도달한다.

'타율'이 출중한 미국 대통령들의 비결이 하드파워가 아니라 뉴스타트 교수가 지적한 '설득력'에 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된다.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윤 대통령이 자주 했던 말이다. 정치를 싫어한 윤 대통령은 정치는 하지 않고 통치만 하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대선 승리로 대한민국의 절대적 통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착각했다. 사실 한국 대통령의 독단적 행태는 윤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다분히 현행 대통령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인한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이나 정치인, 다수의 학자와 언론인조차 대통령제하 대통령의 권한을 실제로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것 이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채택해 운영하는 대통령제는 국정의 효율적 운영보다 권력 집중을 예방하기 위해 고의로 비효율적 요소를 삽입해 만든 제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의 전횡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관행의 문제다. 이 세상에 '제왕적 대통령'은 있어도 '제왕적 대통령제(制)'라는 것은 없다.
'위대한 소통자'로 기억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설득력을,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야심한 시간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여야 지도자를 대상으로 집요하게 구애했던 클린턴의 소통 노력을, 한국의 다음 대통령에게도 기대해 본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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