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낸셜뉴스] "나의 작업은 '우연의 산물'이자 '자연과 함께 만드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개입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자연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돌 같은 자연물 특유의 투박함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작품의 생명력을 불어넣은 조형물들이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재탄생했다.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본질과 자연의 질박한 삶을 담아내는 조각가 홍순모의 개인전 '조형의 여정' 전(展)은 내달 2일까지 가나아트센터 'Space 97'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독특한 질감의 1980년대 '무안점토'부터 새롭게 매진하고 있는 부조 작업인 '드로잉' 연작까지 총 50여점을 선보인다.
홍 작가는 주위 자연에서 작업의 재료를 찾고 그 본성을 끈질기게 탐구해 작업에 적용한다. 그는 목포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1980년대 초 목포로 이주했다. 그때 발견한 무안점토가 그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재료가 됐고 지금까지도 작업의 주재료로 활용 중이다.
무안점토는 보통 반죽으로 만들어 도자공예의 원료로 사용한다. 홍 작가는 이 무안점토를 현대 조각의 시각으로 새롭게 접근했다. 흙반죽으로 만드는 대신 분말 상태 그대로 적용했고, 그 결과 분말의 물성을 살린 거칠거칠한 표면 질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 무안점토 분말에 모래, 폴리에스테르, 호마이카(Formica, 플라스틱 합성수지의 일종) 등 다양한 재료들을 섞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원료를 만들었고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질감을 돋보이게 하는 작업 방식을 고안했다.
그 덕분인지 현장에 전시된 인물 조각품들은 투박하지만 '소박함'과 '친숙함'이 공존하는 모양새다. 단순하고 정적인 형태지만 독특한 비율이 한 몫한 것이라는 평가다.
특히 그의 대표작 '휴식(1990)'은 거칠한 질감의 무안점토 분말을 사용해 일에 지친 아버지의 찌든 모습을 형상화 했고, 금방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하는 느낌을 준다.

또 다른 대표작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1983)'도 무안점토의 투박함으로 절규하는 손동작을 표현한 듯 했다. 군데군데 찔린 듯한 구멍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허물을 가리지 않겠다는 홍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2000년대 초 발표한 석조 두상 작품 '지존의 영성(2005)'과 '흔적의 그늘(2004)'도 자연의 '우연성'을 극대화했다.
그는 거주하던 전라도 지역의 석회암을 이 작품들의 재료로 선택했는데, 정을 사용해 조각할 때 자연스레 떨어져 나가는 재료적 본성을 이해하려고 했다.
결의 분리로 인해 만들어지는 날카로운 선과 울퉁불퉁한 면을 약간의 작가적 개입으로 원석에서 꺼내 얼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것이다.
홍 작가는 "우리 문화의 조형유산은 자연풍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순박미와 자연의 멋이 그러하다"며 "이것이 자연에서 얻은 소재의 물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개입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조형물 외에도 최근 그가 정진하는 '드로잉' 시리즈도 눈에 뛴다.
조각가에게 드로잉은 실제 작업을 하기 전의 밑작업 또는 구상 단계에서의 습작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드로잉은 베니어 합판과 한지라는 재료를 사용해 근래 새롭게 시도하는 부조 작업의 한 시리즈인 셈이다. 즉, 기존의 종이에 드로잉을 하는 게 아닌, 드로잉을 할 밑바탕부터 제작한다는 게 홍 작가의 설명이다.

그의 지론대로 드로잉 대표작 '묵희(墨戱)의 형상 2(2016)' 등도 합판과 한지에 그렸다. 그가 강조하는 '우연성'이 깃든 활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홍 작가는 "지난 2004년 프랑스 파리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먹 등 드로잉 재료를 두고 와 임기응변으로 스펀지 구두약으로 그린 게 '묵희의 형상 2'"라며 "먹이 아니라 구두약으로 그렸지만 우연성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가나아트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대상의 본질을 재해석해 다양한 조형 언어로 변주해온 홍 작가의 조형에 대한 응축된 열정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고 전했다.
한편, 1949년 서울 출생인 홍 작가는 1968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뒤 1976년 동 대학원 조소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 현대 조각의 거장인 김종영과 최종태에게 사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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