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이강 기자 = 검게 변한 산기슭, 숯이 돼버린 나무, 기와만 남은 집. '괴물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탄흔(炭痕)만 남았다. 주민들은 덮쳐오는 화마에 대피소로 달려 나왔다. 한 주민은 굳은 표정으로 대피 당시 영상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쓰나미처럼 밀려왔어, 1분만 늦었어도 다 죽었어."
국립산림과학원 산불사태연구과의 권춘근 연구사는 지난달 22일부터 12일 동안 경북 지역을 돌며 산불현장과 시설물 피해지를 조사했다. 그는 이번 산불을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권 연구사가 역대 최대라고 생각했던 산불은 2022년 3월 4일 발생한 '울진 산불'이다. 산림청에 따르면 울진 산불은 213시간 43분 동안 이어지며 동해안 일대의 약 2만676ha의 산림을 불태웠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당시 울진 산불로 피해를 본 자연이 복구되는데 약 100년이 걸린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와 산림청 등 관계 당국에 따르면 지난달 21일부터 26일까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인해 소실된 면적만 약 4만8000ha로 울진 산불의 2배가 넘는 규모다. 이재민도 지난달 28일 기준 3만3000명으로 '역대 최다'다.
권 연구사는 7일 인터뷰에서 "사상 최악으로 꼽혔던 울진 산불과 비교해도 훨씬 광범위하고 강력했다"며 "특히 6개 시·군으로 번진 피해 규모, 불규칙한 바람 방향, 골짜기 지형의 영향 등으로 진화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밤에도 산불 번지며 현장은 지옥으로…"이례적인 현상"
밤에도 산불이 번지면서 현장은 지옥으로 변했다. 권 연구사에 따르면 야간에 산불이 번지는 일은 흔치 않다. 야간이 되면 기상이 안정돼 진화에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북 지역에서는 밤새 강풍이 이어지며 불길이 멈추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불을 끄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야간에는 랜턴을 끼더라도 시야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지(死地)에 가까운 현장. 진화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됐다. 손쓰지 못하는 새 불길은 숲을 집어삼켰다.
경북을 휩쓴 화마는 '산불은 주로 동해안에서 난다'는 통념을 무너뜨렸다. 내륙 지역도 언제든 대형산불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권 연구사는 "이제는 대형 산불이 발생하지 않는 지역이 없어지고 있다"며 "산불 대응의 전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의 영향도 크다. 권 연구사는 "3월임에도 고온 현상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탈 수 있는 물질이 바짝 마른 상태가 됐을 것"이며 "기온 상승은 야외 활동을 늘려 불이 날 수 있는 요인을 동반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적·자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산불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산불 대형화의 원인이 소나무라는 지적에는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권 연구사에 따르면 일부 학자·비정부기구·언론이 내민 '송진의 휘발성 물질이 불을 키웠다'는 주장이 "영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나무는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소나무가 많아 산불이 나는지, 산불이 번질 환경과 소나무가 잘 자라는 지역이 같은지 구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산불은 소나무가 분포한 침엽수림이 아닌 활엽수림도 피해 가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 2m 가까이 쌓인 활엽수의 낙엽이 산불 확산의 원인이 된 경우도 있었다.
대형 헬기 확보하고 임도 확장해야
권 연구사는 이번 산불 대응을 '최선'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전례 없는 산불에 완벽히 대응하기는 어렵다"면서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자원은 모두 동원됐다"고 말했다. 다만 "산불은 하나의 기관이 끌 수 있는 재난이 아니다"라며 "유관기관 간 반복 훈련과 사전 협조체계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현장 대응 인력에 대한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기관이 어디 있겠나"며 "조금 북돋아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북 현장에서 소방관들은 며칠 밤을 새워 불길과 싸웠다. 의성에서 만난 한 소방관의 머리도 땀에 젖어 있었다. 영상 10도도 되지 않는 날씨였다.
전례가 없었기에 미비한 부분은 있었다. 권 연구사는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공중 진화 자원이 필요하다"며 "특히 담수 용량이 큰 대형 헬기가 더 확보돼야 한다”며 장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 "지상 진화 장비도 담수량이 많고 산림 진입이 가능한 차량을 확충해야 하며, 이를 위해 임도 확장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전 예방 시스템'에 대한 질문에는 "풍속 기준에 따라 대피 경로를 사전에 설정해 두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산불의 확산 속도가 풍속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권 연구사는 주민들의 인식 변화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륙 지역 주민 중에서는 소각하면서도 불씨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분들이 있다"며 "기후변화로 인해 불씨가 쉽게 옮겨붙는 상황에서는 위험한 착각"이라고 말했다. 해결 방법으로는 주민 대상의 의무적 교육과 홍보를 꼽았다.
권 연구사는 "지역과 경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관이 하나의 임무를 위해 협력했던 대응"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미비한 부분을 보다 철저히 보완해야 할 시점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산불을 '전쟁'으로 기억했다. "10일간의 전쟁이었다. 산불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작게는 시도, 크게는 국경도 가리지 않는다. 자연 앞에선 겸손해야 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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