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다시 보다
고려·조선시대 기록에는 목멱산
풍수적으론 도성을 감싸는 案山
나무 193종 숲 이룬 서울의 허파
고려·조선시대 기록에는 목멱산
풍수적으론 도성을 감싸는 案山
나무 193종 숲 이룬 서울의 허파
![한양을 지키는 파수대에서 서울 시민들의 도심속 휴식처로 [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07/202504071813138846_l.jpg)

높이 265m인 서울 남산의 옛 이름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목멱산(木覓山)이다. 그 의미는 '마뫼' '말뫼'로, 남산의 순우리말이다. 마뫼는 마산(馬山) 혹은 마시산(馬尸山)으로도 불린다. 밝은 산의 의미로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으로도 불렸고 도성의 가장 남쪽이라는 의미로 종남산(終南山)으로도 불렀다. 명당 터의 남쪽 경계이면서 명당을 잘 막아주는 버팀대로 보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록에는 거의 목멱산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일반 백성들은 남산이라 했다. 공양왕 2년(1390년) 잠시 천도한 한양에서 호랑이가 나타나니 이를 막기 위한 제사를 목멱, 북악, 성황 등에서 지내도록 했다. 조선 태종 때 남산에 목멱신사(木覓神祠)를 만들어 왕실과 백성의 안위를 위한 국사당(國師堂)으로 삼았다. 목멱단으로도 불리면서 남산 팔각정 옆에 위치한다.
남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도성 한양을 편안하게 해주는 안산(案山)이다. 도성을 감싸는 4곳 산지 지형을 보면 목멱산(남주작), 북악산(북현무), 낙산(좌청룡), 인왕산(우백호)이다. 남산은 도성의 기능을 하면서도 안산 역할도 하는 것이다. 한강 건너 보이는 높은 관악산은 아득한 조산(朝山)이 된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사대문 안 도성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남산의 소나무는 조선시대에 공공용으로 조림한 것이다. 조선 도성을 한양으로 결정할 때 남쪽의 목멱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도성의 남쪽 성곽을 남산이 맡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남산은 풍수지리적 기능 외에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했다. 전국 봉수망의 중앙 조절 기능을 한 것이다. 남산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봉수와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봉수를 조정에서, 궁궐에서 잘 관찰할 수 있었다. 지금도 조선시대의 봉화대처럼 통신·군사 시설 등 서울을 지키는 기능들이 작동되고 있다.
남산에는 모두 5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가장 동쪽은 아차산 봉수를 거쳐서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고, 다음은 청계산을 거쳐 경상도로 가고, 셋째는 무악산을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로 가고, 그다음은 수락산을 거쳐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 봉화로 연결되고, 다섯째는 김포 개화산을 거쳐 전라도와 충청도로 갔다. 현재 복원된 봉수는 평안도로 가는 봉수대 자리다. 이 자리에서는 한양의 구조, 도성 내부와 백악산, 인왕산, 타락산 등이 잘 보인다. 봉수대 하나마다 5개의 봉화대가 설치되는데 평상시에는 1개이지만 위급하면 5개 모두에 연기나 불을 피운다.
남산은 사실 한양을 지키는 파수대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한양을 두르는 한강 전체가 보이고, 건너 여러 지역들이 잘 관찰된다. 남산의 북사면에는 남촌이라 하여 하급관리, 벼슬이 없거나 몰락한 양반, 평민들의 마을이 들어섰다. 이들을 '남산골 샌님'이라고 했다.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센 선비를 일렀다. '남산골 딸깍발이'도 있다. 가난하여 나막신을 딸깍거리며 신고 다니는 선비를 그렇게 불렀다. 남촌은 한양의 부촌인 북촌 및 서촌과 대조되어 왔다. 현재는 북촌과 함께 괜찮은 남촌 가옥들이 복원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북서 자락 용산에는 일본군영이 들어섰고, 이것이 용산 미군기지로까지 연결됐다. 용산은 인천으로 나가는 서울의 길목이며, 서울의 동서남북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군사적 요지였다. 남산의 서녘 후암동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을을 이뤘고, 많은 적산가옥을 남겼다. 당시 일제는 남산에 그들의 신사를 지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철수하고 북한 월남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인구가 밀집해 판잣집이 늘어났다. 해방촌이다. 후암동 시장을 중심으로 해방촌은 서울의 섬처럼 지역성이 뚜렷했다. 상대적으로 이태원동, 한남동은 부유촌이었다.
남산에 잠두봉(蠶頭峰)이 있다. 조선시대 누에는 섬유 생산의 핵심이었다. 전국에 잠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충북 청주의 잠두봉과 양화진의 잠두봉이 대표적이다. 남산의 잠두봉은 잠실과 잠원동의 뽕밭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국가적으로 잠업이 필요하여 한양에 가까운 잠실과 아차산 아래, 잠원동 등에 잠실을 조성했다. 연희동 근처에 동잠실도 있다.
겸재의 스승 삼연 김창흡이 잠실에서 남산을 보면서 시를 남긴다. "짙푸르게 눈에 들어오네 저 먼 송림, 소 등을 탄 누에 머리가 만산에 그늘 덮네. 늘 편안히 푸른 패기를 기르니, 천년을 넘어도 도낏날 받지 않겠네." 잠실에서 남산을 잠두로 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남산에 조선신사가 들어섰다. 1975년 남산 정상에 서울타워가 들어섰다. 서울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인공시설이다. 하여 남산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도권 시민의 휴식처가 된 것이다. 당연히 공식적으로 숲도 잘 조성되고 보존되고 있어 도심의 허파 기능을 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유명한 남산 송림과 함께 자연림에 가까운 활엽수림도 잘 조성되어 있다. 1978년 서울농대 임경빈 교수 연구에 의하면 남산숲은 48과 69속 193종의 나무가 있었다. 현재는 서울의 도시적 변화에 따라 지형과 식생의 구조가 달려져 있겠지만, 나름의 보존도 이뤄지고 있다.
목멱 남산은 편마암 산지로 바위가 단단하면서 검고, 숲이 울창한 흙이 잘 덮인 토산이다. 경기편마암으로 대략 5억년 이전 선캄브리아기이다. 중부 지역에서 지질적으로 가장 오랜 암석이다. 남산에서 평지로 내려오다 보면 기슭에 화강암 지대를 만난다. 화강암은 대략 1억5000만년 된 대보화강암이다. 남산의 남향은 햇볕을 잘 받아 마른 땅이 되면서 소나무 종류가 상대적으로 우세하다. 북사면은 화강암 산지로 햇볕이 적고, 그리하여 수분이 잘 보존되어 참나무 중심으로 활엽수림이 잘 발달한다. 화강암과 편마암이 극적으로 만나는 곳의 예를 보면, 장충단과 국립극장은 편마암이고 길 건너 자유연맹과 옛 타워호텔 지역은 화강암이다. 근처의 성곽석은 화강암과 편마암이 함께하는 곳이 많다. 과거 성채를 이뤘던 성곽석들이 허물어지고, 더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의 남산은 서울의 대표적인 공원이고 외국 관광객도 즐겨 찾는 곳이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존중과 사랑을 받은 남산에는 현재 남산타워, 남산팔각정, 남산봉수대, 남산한옥마을, 남산 성곽길, 한남공원 등이 함께한다. 남산은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소파 방정환,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안고 있다. 남산은 북악산과 인왕산 등 북한산열과 함께 도심, 한강, 강남 등 서울권 거의 전반을 살필 수 있는 조망산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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