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업과 옛 신문광고

[기업과 옛 신문광고] 삼화고무와 김지태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4.10 18:15

수정 2025.04.10 18:15

[기업과 옛 신문광고] 삼화고무와 김지태
광역시로서는 최초로 인구소멸 위험지역으로 선정됐고, '노인과 바다'만 남았다는 부산의 몰락은 신발산업 쇠퇴와 궤를 같이한다. 부산 신발산업을 이끌던 중심 인물은 국제그룹 양정모와 삼화고무 김지태였다. 거칠고 불편한 짚신을 신고 걸었던 이 땅의 백성들은 19세기 말부터 일본에서 들어온 몰랑몰랑한 고무신을 신게 되었다. '고무'는 일본어의 'ゴム (gomu)'를 차용한 말이다. 일본어 'gomu'는 네덜란드어 'gom'을 일본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고무신 공장은 우후죽순 들어서 1933년 72개에 이르렀다. 과잉생산 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총독부가 업체들을 통폐합해 부산 범일동에 만든 기업이 삼화고무였다.

일제강점기의 삼화고무는 연간 1000만족을 생산할 수 있는 대기업이었으며 중일전쟁 때는 군수공장 역할을 했다. 광복 후 적산(敵産)기업으로서 몇 사람의 손을 거쳤던 삼화고무를 1958년 인수한 사람이 김지태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옛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동양척식회사에도 근무했다. 1935년 제지회사인 조선지기주식회사를 창업했고 광복 이후 한국생사와 조선견직을 설립, 재벌 반열에 올라섰다. 문화방송을 창립하고 부산일보를 인수하는 등 언론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까지 농어촌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무신을 신었다. 도시에서도 운동화를 신은 학생은 많지 않았다. 범표 삼화고무를 필두로 부산에는 왕자표 국제화학, 말표 태화고무, 기차표 동양고무, 진양고무 등이 들어서 신발산업의 메카가 됐다. 부산은 고무 등 신발 원료를 조달하기 쉬운 항구인 데다 노동력도 풍부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동천에서 공업용수를 끌어 쓰기에도 용이했다.

김지태는 신발로 큰돈을 벌어 삼성이나 현대보다 먼저 재벌 반열에 올랐고 부산 지역에서는 '돈지태'로 불렸다. 김지태는 박정희 정부가 출범할 때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김지태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다 쿠데타를 모의한 박정희의 거사 자금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 일로 부정축재자로 몰리고 부일장학회와 부산문화방송 등 재산을 환수당했다는 것이다.

살기가 좋아지면서 신발은 고무신에서 직물로 만든 운동화(캔버스화)로 바뀌어 갔다. 운동화는 19세기 말 서양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고무밑창을 단 운동화는 영어로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걷는다는 의미에서 '스니커즈'라고 부른다. 유명한 상표인 '컨버스' 농구화가 처음 출시된 것은 1917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1년 '편리화' '경제화'라는 고급 신발이 나왔는데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운동화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부터 쓰였으며 양화점에서 소량으로 생산했던 귀한 신발이었다. 대륙고무신 회사에서 학생 운동화를 제조했다는 광고가 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는 "'서울선 아무도 안 왔어요?' 하고 물으면서 운동화를 벗어던졌다"는 구절이 나온다.

1960년대 이후 운동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신발산업은 전성기를 맞는다. 주요 신발업체 외에도 LG그룹의 모태 '락희화학'도 운동화를 제조했다. 삼화고무의 '타이거' 운동화는 국제상사의 '프로스펙스'와 함께 1980년대 초반까지 시장을 주름잡았다(조선일보 1983년 8월 27일자·사진). 1976년 삼화고무는 ㈜삼화로 이름을 바꾸고 계열사를 거느린 종합무역상사로 탈바꿈했다. 당시 삼화는 한국생사, 조선견직 외에도 동방증권, 동방제지 등 9개 계열사를 둔 거대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신발산업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이었다. 1982년 김지태가 사망한 후에도 삼화고무는 수출 실적 1~2위를 다투었다. 그러나 노동집약적 산업이라 후진국들이 뛰어들고 '나이키'와 같은 세계적 브랜드들이 들어오면서 신발산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2년 9월 삼화고무는 부산의 대형 신발업체 가운데 가장 먼저 도산해 사라졌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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