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낸셜뉴스] 예술과 와인은 닮았다.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겠지만 우선은 어렵다. 예술과 와인을 접하는 입문자들에게 이 어려움은 큰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이 어려움의 기저에는 예술을 감상하고, 와인을 음미하는데 어떤 '정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선입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과 와인 모두 작가와 공급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온전히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
물론 우리가 무언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많이 알수록 좋다.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를 감상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그림을 보는 것과, 스페인 내전이 발생한 이유와 피카소가 속했던 큐비즘이라는 미술 사조를 알고 보는 것은 이해의 깊이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게르니카의 경매 가격이 수천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만 알고 봐도 그 그림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예술과 와인 모두 어렵기 때문에 두 영역 모두 대중에게 이를 쉽게 설명해 주기 위한 전문적인 직업인이 존재한다. 도슨트와 소믈리에가 이에 해당한다.
필자는 앞서 문화부에서 미술과 전시를 1년 정도 담당했었는데 도슨트의 역할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훨씬 넘어서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미술품도 여느 상품과 마찬가지로 1차 시장(갤러리)과 2차 시장(경매)에서 가격이 매겨진 상태로 거래가 된다. 도슨트가 어떤 작품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고, 그럴듯한 서사를 붙이느냐에 따라 해당 미술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이해도가 올라가고, 이는 다시 소장가들의 소유 욕구를 자극해 해당 미술품의 가격이 올라가기도 한다. (물론 어떤 작가의 경우 금, 비트코인과 같은 투자 자산의 생산자로서 예술성보다 가치 저장의 수단이나 탈세의 목적으로 키워지기도 하는 것 같다.)
때때로 갤러리의 첫 전시회 때 그 그림을 그린 작가 조차도 제대로 해당 작품의 의미와 창작 의도에 대해 그럴듯한 말로 풀어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유능한 도슨트가 작가도 잘 설명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그럴듯하게 표현해 내면 작품의 예술성이 더 빛을 밝한다.
같은 예술 작품과 와인이라도 그것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진가가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희소성이 높을 수록 가격이 비쌀 것 같지만 환금성(현금으로 교환) 역시 가격에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파트가 단독 주택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이는 아파트가 갖는 여러가지 장점 외에도 환금성이 좋기 때문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비싼 이유는 입지도 좋고, 동네가 좋은 탓도 있지만 언제든 원하면 현금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술 시장에서도 보관과 판매가 용이한 회화 작품이 조각 작품 대비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자주 거래된다. 앤디워홀의 판화 작품이나, 호박 시리즈로 잘 알려진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아주 많은 경우에 예술과 와인에 대해 많이 알수록 좋고, 잘 모를 때는 누군가가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누군가의 도움없이 온전히 자신의 시각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싶거나, 구구절절한 소믈리에의 설명을 듣기 보다 바로 와인의 마개를 열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일이 급할때도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심판과 서울의 심판
와인을 마시기 시작해서 이것저것 귀동냥을 하다보면 반드시 알게 되는 사건이 있는데 바로 '파리의 심판'이다. 파리의 심판은 1976년 5월 2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역사적인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시합이다.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알려진 프랑스 와인과 신흥 국가였던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을 동인 조건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한 사건이다. 세계 최고로 여겨지는 프랑스 보르도(레드), 부르고뉴(화이트)와인과 캘리포니아 신생 와이너리 10종이 대상이었다. 심사위원 대부분은 프랑스 출신의 와인 전문가로 총 11명이 참여했다. 와인 이름과 생산지를 숨긴 채 맛과 향, 품질만을 평가하는 사건이었다.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흑백요리사에서도 눈을 가리고 맛만을 평가하는 시험이 있지 않았던가.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모두의 예상을 깨고 레드와 화이트 부문 모두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프랑스인이 받은 충격은 한국과 일본의 요리 전문가가 총각 김치와 배추 김치를 만들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는데 한국인으로 구성된 심판진이 일본의 기므치가 더 맛있다고 판정한 것 이상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파리의 심판 10년 뒤인 1986년과 30주년이 되는 해에 비슷한 방식의 테스트가 진행됐으나 이때에도 미국 와인은 프랑스 와인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파리의 심판을 본따 한국에서도 비슷한 이벤트가 열렸다. 2011년 1회 서울의 심판이 열렸고 당시에는 호주 와인들이 프랑스 와인보다 뛰어난 평가를 받았다. 또 2023년과 2024년에도 서울의 심판이 있었다. 롯데백화점과 국제소믈리에협회가 한강 세빛섬 등에서 개최한 행사다. 국내외 수입사 8곳이 10만원 이하, 아직 출시되기 전인 70여종의 와인을 출품했다. 심사위원으로는 만화 '신의 물방울'의 작가 아기 타다시 남매, 국내외 와인 전문가와 소믈리에 등 10~11명이 참여했다.
그 결과 스파클링 와인 분야 1위는 호주 '브라운브라더스 프리미엄 뀌베 NV'가 차지했고, 레드 와인 분야 1위는 미국 '본테라 에스테이트 콜렉션 까베르네 쇼비뇽'이 차지했다. 파리의 심판과 유사하게 와인 종주국 격인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호주, 미국 등의 신대륙 와인이 더 우수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유기농 와인 명가 본테라 와인
지난 9일 서울 반포에 위치한 무드서울에서 미국 본테라 와인을 시음하는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콘차이토로의 브랜드 엠버서더인 이소리 소믈리에의 진행으로 본테라의 다양한 와인을 시음해 볼 수 있었다.
본테라는 1987년 캘리포니아 멘도치노에서 설립된 유기농 와인 브랜드다. 이름 자체가 라틴어로 ‘좋은 땅’을 뜻하며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브랜드다.
이소리 소믈리에는 "최근에는 '포도 없이도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와인에 다양한 첨가물이 많아졌다"며 "본테라는 유기농 와인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기도 전인 1987년부터 산화 방지제, 아황산염 등을 최소해 포도 본연의 맛을 끌어내는 와이너리"라고 설명했다.
이날은 1종의 화이트 와인과 3종의 레드와인을 시음했다. 시음 와인은 △본테라 소비뇽 블랑 △본테라 카베르네소비뇽 △본테라 에스테이트 카베르네소비뇽 △본테라 맥냅 등이었다.
먼저 화이트 와인인 '본테라 소비뇽 블랑'은 맑고 상큼한 맛으로 함께 서빙된 도미세비체와 잘 어울렸다. 세비체는 날 생선살을 식초나 레몬즙 같은 산으로 조리하는 요리 방식이다.
본테라 소비뇽 블랑은 레드 와인 중 입문자를 위한 와인으로 2025년 대한민국 주류 대상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상을 수상했다. 입문자용 미국 와인은 가성비는 좋지만 맛도 그닥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본테라의 해당 와인은 엔트리 급임에도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 복잡하지 않고 작은 육감형을 갖춘 레드 와인이었다.
본테라 에스테이트 카베르네소비뇽은 등급으로는 중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입안에 처음 넣었을 때 가장 첫인상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피노누아 레드 와인이 단순하고 한가지 특징이 느껴지는 맛이라면 카베르네소비뇽은 약간 과장해서 젓갈을 먹을때처럼 다채로운 감칠맛이 느껴지는데 좋은 레드와인에 부합하는 맛이었다.
마지막으로 마신 본테라 더 맥냅은 가장 비싼 와인이라는 걸 알고 먹으니 더 좋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가격이 비쌀수록 더 맛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는데, 개인적으로 더 저렴한 와인이 맛있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아서 이럴 때는 '오히려 좋아, 럭키비키'라고 생각하게 된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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