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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초청 '안경' 정유미 감독 "고통, 조용히 껴안을 때 치유 시작되죠"

신진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4.22 00:03

수정 2025.04.22 09:24

2025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단편경쟁 초청
"연필 특유의 질감과 감정 무척 좋아해"
김해김, 콘진원, 부천국제애니페스티벌 제작지원작
정유미 감독과 그가 연출한 단편 '안경' 보도스틸. 매치컷 제공
정유미 감독과 그가 연출한 단편 '안경' 보도스틸. 매치컷 제공

[파이낸셜뉴스]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Glasses)’으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은 21일 “정말 기쁘고 설렌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 감독이 칸의 러브콜을 받은 것은 지난 2009년 ‘먼지아이(Dust Kid)’이후 두 번째다. 당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 칸영화제 기간 중에 열리는 감독주간에 초청된 데 이어 이번엔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 비평가주간의 초대장을 받았다. 특히 올해는 ‘장편’ 기준 12년 만에 한국영화가 단 한 편도 초청되지 않은 가운데, ‘안경’의 초청은 그야말로 낭보다.

정 감독은 “영화제를 통해 작품이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경험은 늘 소중하다”며 “이번 초청 역시 더 많은 관객과 마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안경', 흑백 연필 드로잉 화풍 인상적

‘안경’은 김해김(Kimhēkim),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의 제작지원을 받아 완성됐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와 마주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정 감독 특유의 흑백의 연필 드로잉과 절제된 연출로 표현했다.

"연필 드로잉과 디지털 작업을 병행 중"이라는 정 감독은 "연필 특유의 질감과 감정을 무척 좋아해서, 어떤 매체든 그 감성을 결과물에 녹이려 노력한다”고 자신의 화풍을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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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 감독과 그가 연출한 단편 '안경' 보도스틸. 매치컷 제공
정유미 감독과 그가 연출한 단편 '안경' 보도스틸. 매치컷 제공

그는 “디지털 도구가 훨씬 빠르고 유연하기 때문에 요즘은 연필만으로 작업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면서도 “연필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잃지 않으려 항상 조심하며, 그 두 방식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저만의 스타일이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특히 저는 흑백 톤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데 익숙한데, 사실적인 장면을 흑백으로 그리면 시간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그 흐릿한 경계에서 오는 감정이 늘 저를 사로잡습니다. 또, 세밀한 흑백 묘사는 때때로 고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런 불안하면서도 매혹적인 긴장감 또한 제가 이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안경’은 심리적 성장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자신 안에 억압돼 있던 감정과 기억을 은유적으로 풀어내며, '그림자와의 화해'라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아냈다.

정 감독은 “우리는 자기 존재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신념을 품고 있다고 느낀다”며 이번 작품의 기획 배경을 떠올렸다.

그는 “그 왜곡된 시선 속에서 판단 받고 배척된 내면의 존재들은 마음 깊은 곳에 고립돼 외롭게 자리하게 된다”며 “하지만 그런 버려진 존재들을 따뜻하게 감싸안을 때, 그들은 오해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안경’의 주인공이 마주하는 존재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들은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계기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손을 통해 반복되는 작고 단순한 의식들 속에서 서서히 변형되고, 마침내 ‘변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아픔을 치유하는 길 역시 그러하다고 믿습니다.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껴안을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척박한 애니 제작 환경 "다양한 형태 작업 존중..풍성한 생태계 조성될 것"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2003년 시작된 TV 애니 ‘뽀로로’의 흥행에 힘입어 ‘어린이 타깃’ 위주로 성장해 왔다. 컨설팅업체 Pwc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7600만달러로, 글로벌 시장(38억7700만달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했다.

특히 ‘어른아이’를 겨냥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가뭄에 콩나듯 개봉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펴낸 ‘2024 애니메이션 이용자 조사’에 따르면, 극장용 국산 애니메이션 시청자 비율은 2021년 17.6%, 2022년 12.9%, 2023년 12.7%로 매년 감소 추세다.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 '파도' 스틸 컷. 매치컷 제공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 '파도' 스틸 컷. 매치컷 제공

단편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살아남기가 결코 녹록지 않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미술을 전공한 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서 애니메이션 연출을 전공한 정 감독은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이어왔다.

정 감독은 2009년 ‘먼지아이’ 칸 초청 이후 2013년 ‘연애놀이(Love Games)’로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2010년 ‘수학시험(Math Test)’은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초청됐다. 2023년 ‘파도(The Waves)’는 로카르노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2014년 ‘먼지아이’를 그림책으로 출간해 한국 그림작가 최초로 볼로냐 라가치 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나의 작은 인형상자(My Little Doll’s House)’로 라가치상을 2년 연속 수상했다. 그 외에도 ‘수학시험’(2010), ‘연애놀이’(2013), ‘존재의 집’(2022), ‘서클’(2024) 등 네 편의 작품이 베를린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연속 초청됐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작업을 이어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정 감독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며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오고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작업은 대부분 혼자서 오래 고민하고 반복해야 하는 일이기에, 아마 다른 재능이 있었다면 중간에 그만뒀을 거 같기도 하다"며 "그래도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작품으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제겐 중요하고 또 감사한 일인 것 같다"고 부연했다.

애니메이션 창작 환경에 대한 개선점을 묻자 “점점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다양한 형태의 작업들이 존중받고,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 더 열리길 바랐다.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은 대체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순수 창작에 가까운 편이에요.
이런 장르들은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고, 그에 따라 저도 작업의 방향을 조금씩 조정해 나가고 있죠. 많은 창작자들이 상업성과 창작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무작정 ‘이런 비상업적인 작업을 지지해달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다양한 형태의 작업들이 존중받고,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 더 열린다면,
결과적으로 더 풍성한 콘텐츠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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