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은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학대 등 혼란 겪는 소년들 많이 봐
구제 위해 가사·소년전문 법관 길
사건 커지기 전 중재 필요성 느껴
20년 입은 법복 벗고 변호사 변신
"좋은 어른 모습 보여주고 싶어"
"가사분야 의미 있는 선례 만들고파"

약 20년 만에 법복을 벗은 정혜은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47·사법연수원 35기·사진)는 법정 밖에서도 보호소년(형사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는 만 19세 미만의 소년)과 인연을 이어가며 진정성을 보여준 법관으로 꼽혔다. 그는 보호소년에 대해 아동복지시설 등에 감호를 위탁하는 6호 처분을 내린 뒤 보호시설의 아이들을 찾아가 작은 변화를 함께 기뻐했다.
가사·소년 전문 법관 출신인 정 변호사는 "소년 사건에서 보호처분을 내리고 아이들을 만나러 가면, 자신을 가둬 둔 판사임에도 엄청 기다린다"며 "아이들한테는 좋은 어른을 만날 기회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정 변호사는 법정에서 마주한 가정폭력 피해 아동, 이혼 가정의 혼란 속 소년들을 보며 이들이 성인이 돼 또 다른 가정폭력을 일으키는 '악순환'을 끊고자 했다. 그런 경험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가사소년전문법관의 길을 걸었고, 단순한 사건 해결을 넘어 구조적 문제 개선에도 힘썼다.
가사 사건은 기록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정 변호사는 "기록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일"이라며 당사자들의 심리적 회복을 돕는 과정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소년 재판 중 아이들이 보여준 사소한 긍정적 변화도 그냥 넘기지 않고 칭찬하며, 아이들 스스로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정 변호사에겐 늘 아쉬움이 있었다. 판사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개입할 수 있고, 그 시점엔 이미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이 커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변호사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사건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고민 끝에 법원을 떠나 지난달 태평양 가사분쟁팀장으로 합류했다. 이제는 사건 발생 전 단계에서 갈등의 불씨를 조기에 진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법관 시절과 가장 달라진 점은 일하는 방식이다. 법관은 혼자 기록을 검토하고 판결문을 쓰는 고독한 직업이지만, 로펌 변호사는 협업이 기본이다. 그는 "사건 하나를 두고 다양한 관점과 아이디어가 모이는 과정이 새롭고 흥미롭다"며 팀워크 속에서 더욱 창의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변호사는 "태평양에 합류해보니 전문가간 협업이 잘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며 "한 사건에 가사, 조세, 형사, 민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서 회의하고 의뢰인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안을 찾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태평양의 장점은 대형 이혼 소송과 재산분할 사건 등에서 좋은 선례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정 변호사는 강조했다. 그는 "기업의 오너가 혹은 대주주의 이혼과 재산분할, 상속분쟁은 경영권 문제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며 "태평양 전문가들과 기업법과 가족법이 중첩되는 영역에서 예측가능성과 구체적 타당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선례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로펌 업계에서 가사 분야는 고액 자산가의 이혼, 재산 분할, 상속 등 민감한 사안이 증가하며 주목받고 있다. 특히 성년후견(질병·장애 등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할 능력이 결여된 성인을 보호하고자 후견인을 정하는 일) 사건이 늘고, 상속을 둘러싼 분쟁도 복잡해졌다. 치매 등 인지능력 저하로 부모에 대한 후견 신청이 상속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정 변호사는 "이런 갈등을 예방하려면 유언장 작성, 유언신탁, 임의후견 계약 등이 필요하다"며 "인지장애가 생긴 이후에도 자기결정권이 보호받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갈등 예방을 위한 자산 점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변호사는 "갈등의 예방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산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의사대로 자산을 승계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준비해 가족 간의 분쟁을 완화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scottchoi15@fnnews.com 최은솔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