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할 일 없는 놈이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던 그는 심드렁하게 혼잣말을 했다. 경쾌한 목소리의 여성 DJ가 전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사연은 비 오는 날 남편이 직접 만들어준 칼국수를 먹고 감동한 아내가 보낸 것이었다.
딱히 흘겨볼 일도 아니건만 불평은 이어졌다. 그냥 나가서 한 그릇 사먹이면 되지 뭘 복잡하게 국수를 삶고 직접 국물까지 내느냐며. 그러고보니 공중파TV 가상결혼프로그램에서 여자 친구를 위해 종종 도시락을 준비했던 남자 가수가 남성 안티팬들의 공격에 몸살을 앓았다는 것도 이해가 됐다.
“남자란 능력있는 남자란 것과 바쁘다는 것을 정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요상한 동물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명쾌한 분석이다. 실로 그렇다. 잘났든 못났든 남자들은 바쁜 척 하길 좋아한다.
물론 그 ‘바쁜 척’이라는 것은 철저히 사회적이며 가정 바깥의 것이다. 가족과의 관계란 저절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회사일만큼 따로 돌보고 챙겨야 한다는 ‘성가신 진리’를 남자들은 여전히 불편하게 여긴다.
젊은 날을 ‘바쁘게’ 보낸 남자들의 노후는 -매우 슬프게도- 그리 따뜻하지 않다. ‘뿌린대로 거두리라’라는 명제는 어디서나 통한다. 여성성을 잃어버린 아내는 어떤 말에도 무덤덤하고 자식들은 두꺼운 벽을 둘러치고 대화를 꺼린다. 바로 이때부터 중년의 고독은 시작된다. 외로움에 몸부림쳐 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뮤지컬 ‘락시터’는 바로 이런 남성에 주목한다. 중년의 위기를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 연극은 꽤 있지만 뮤지컬은 흔치 않다. 철저하게 여성들의 코드로 운영되는 뮤지컬 세상에서, 더욱이 ‘뮤지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남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한 것 자체가 무척 독특하다.
이 작품은 희곡작가 이근삼의 ‘낚시터 전쟁’을 각색한 것이다. 낚시터에서 우연히 만난 30대 중반의 은행원 가제복과 60대의 음식점 주인 오범하가 티격태격하다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연극에서는 이들이 지닌 삶의 무게를 전하는 게 주였지만 장르를 옮기다 보니 분위기가 코믹한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이런 변환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이봉련, 오의식 두명의 멀티맨이다. 이들은 징수원, 다방레지, 불륜커플, 노부부, 구조대원 등으로 쉴새 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웃음 채집에 나선다.
멀티맨의 색깔이 강한 덕에 정작 두 주인공의 속내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작품의 절반가량을 웃고 지나치다 보니 정작 제복과 범하가 가진 고민에는 집중하기 힘들다. 그 탓에 제복은 그저 신경질적인 인물로, 범하는 속 없고 오지랍이 넓은 인물로만 기억된다. 또 30세의 나이차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두 배우의 겉모습과 연기도 좀 의아하다. 꼬집어 말하면 가제복과 오범하가 암만 봐도 동년배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재미가 점령해버린 전반부와 급하게 진지해지는 클라이막스의 간극은 크다. 후반부에는 객석으로 초대장이 날아든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대에 올라선 30대 남성 관객은 얼떨결에 소주 2잔을 들이켰고 라면국물까지 후루룩 마셨다. 이 장면 덕분에 간극 속에 버려졌던 관객들은 웃음을 되찾았고 작품은 잃었던 점수를 다시 땄다. 오는 8월 16일까지 서울 대학로 소극장축제.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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