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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대한제국 황제, 의문사하다 '고종 독살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9.04 17:05

수정 2021.09.07 11:36

<정변의 역사 ⑰>
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황제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과 의문의 죽음 전말 
1919년 3월 3일에 거행된 고종의 국장(國葬)
1919년 3월 3일에 거행된 고종의 국장(國葬)
[파이낸셜뉴스] "...(중략)...한진창씨는 광무태황제가 독살된 게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이렇다. 이상적이라 할만큼 건강하던 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황제의 이는 모두 구강 안에서 빠져있고, 혀가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cm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행한 민영달씨가 한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中

20세기 초,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오랫동안 노렸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했다. 약 500년 간 이어진 조선과 이후 대한제국의 주권(主權)은 일본에게 철저히 종속됐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高宗)은 이제는 그저 일본의 식민지(植民地)가 된 나라의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그동안 고종은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은 황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민비 외척(外戚) 세력과 해외 열강들에게 크게 휘둘렸고, 결국 나라가 망국(亡國)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책임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항상 뒤따랐다. 물론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지만, 그럼에도 국권(國權) 침탈 후 '유폐(幽閉)된 황제' 고종은 일본의 감시와 압제 속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나름의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안들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 무렵 고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서(急逝)였기에 민중들의 충격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급기야 고종이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현재 정사(正史)로 받아 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정황과 증언 등으로 인해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고종 독살설은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다.

어찌 보면 고종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설움과 분노가 크게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결국 '3.1 운동'이라는 거국적인 민족 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왕정이 아닌 민주 공화정(共和政)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빼앗긴 비운(悲運)의 황제, 고종의 국권 회복 노력과 의문의 죽음 전말을 되돌아봤다.

■국권 침탈, 유폐
1905년, 일본의 강압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됐다. 직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돼 대한제국의 내정은 일본에 완전히 장악됐고 외교권은 박탈됐다. 이때부터 사실상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감으로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할 때 고종에게 이를 재가(裁可)할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늑약의 재가를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조약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으로 체결됐는데, 여기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고 조약 명칭도 기재되지 않았다.

고종은 을사늑약에 대해 "짐을 협박하여 조약을 조인했다"고 주장하며 무효를 선언했고, 국제 사회에 친서를 보내 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했다. 미국인 헐버트를 통해 "보호 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늑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急電)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고,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을 밀사(密使)로 파견해 끝까지 을사늑약 무효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일본의 공작 등으로 인해 무위(無爲)에 그쳤고,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유약한 순종(純宗)을 즉위시켰고,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꿨다. 폐위된 고종은 '유폐된 황제'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으로 부임한 후 한국의 황실과 행정부를 장악했고, 병력을 동원해 고종의 주변을 철저히 차단하고 고립시켰다. 특히 '궁금령'(宮禁令)을 제정 공포해 모든 외부인들이 궁궐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일본 경무고문부의 허가증을 얻도록 했다. 만약 허가증을 받지 않고 출입하면 엄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조치와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는 '궁궐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결국 고종은 한 나라의 황제에서 신하들조차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매우 처량한 폐주(廢主)로 전락했다.

■반전 모색, 급서
고종의 유폐 생활은 장기간 지속됐지만, 이 와중에도 고종은 은밀히 밀지(密旨)를 내려 항일 의병 투쟁을 독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된 후 전국 각지에서는 유생과 농민을 비롯해 군인과 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의병 투쟁이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1918년에 이르러 고종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포착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을 중심으로 '민족 자결주의'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는 정치적 원리의 하나로서 민족 의식을 지닌 한 집단이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고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러한 사상을 통해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청산하는 국제 협상인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내려고 했다.

아울러 이 즈음 고종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베이징으로의 망명(亡命)을 은밀히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면 독립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求心點)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민비의 사촌동생인 민영달이 5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는데, 이회영은 이 자금으로 베이징에 고종이 거처 할 행궁(行宮)을 마련하려고 했다. 기실 고종이 망명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고종은 1904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로의 망명을 시도한 것을 시작으로 총 5차례에 걸쳐 해외 망명을 모색했다.

이처럼 유폐된 황제는 나름대로 반전(反轉)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단순한 계획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 뒤따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밤, 별안간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건강했던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향년 68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한 것이다.

■독살설 논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중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평소에 고종이 매우 건강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이를 쉽사리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도 그가 쓴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서 "나는 너무 뜻밖이어서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혹시 창덕궁(순종) 쪽이 아닌가 반문했다"면서 "그렇게 물은 것은 왕 전하께서 평소 병약하셨기 때문이며 덕수궁(고종) 전하께서는 매우 건강하셨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승하하기 얼마 전까지도 고종은 수라(水刺)를 잘 들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민중들 사이에선 고종의 죽음과 관련한 논란이 증폭됐다. 바로 '고종 독살설'이다. 고종의 평소 건강 상태와 그가 은밀히 추진했던 반전을 감안할 때 고종이 일본 및 친일파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수 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시간이 갈수록 독살설은 그 이유와 연루자들의 실명까지 등장하며 구체화됐다. 광화문 앞 전수학교의 벽에는 '저들(일본)이 파리강화회의를 두려워해 우리 황제를 독살했다'는 내용의 글이 붙여졌다. 고종의 죽음 직후 발표된 '국민대회성명서'에는 일본이 이완용에게 윤덕영, 한상학이라는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리도록 했다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외국인인 마티 윌콕스 노블의 일기에도 등장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해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한 때 독립운동가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쓴 일기였다. 윤치호는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민비의 사촌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는 매우 건강하던 고종이 식혜를 마신 후 짧은 시간 내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그 시신의 팔다리는 하루 이틀 만에 크게 부어올라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다고 적혀있다. 이어 실제로 염(殮)을 행한 사람에게 직접 들었다고 전제한 후 죽은 고종의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기다란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고 적혀있다. 승하 직후 고종에게 식혜를 올린 궁녀 2명도 의문사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병조판서를 지낸 민영휘가 홍건이라는 사람에게 한 말을 기록한 부분에서는 고종이 한약을 한 사발 먹고 난 후 한 시간도 못 돼 현기증과 위통을 호소했고, 잠시 후 고종의 육신이 심하게 마비돼 민씨가 도착했을 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더욱이 고종이 죽어가면서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쥐어서 환관이 이를 푸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전한다. 윤치호는 일기에 증언자들의 실명을 모두 기재함으로서 신빙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는 윤치호 일기에 나와있는 고종의 심한 경련은 독성 급성중독에 의한 것이고, 시신이 부어오른 것은 중독에 의해 사후 부패가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목에서 복부까지 난 검은 줄은 시신 부패 시 피부 혈관들이 그물처럼 나타나는 '부패망'이며, 고종이 민씨의 두 손을 세게 움켜쥔 것은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에 맞서 본능적으로 생명줄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보고 있다.

고종 독살설과 관련한 증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총독부의 주요 관리였던 구라토미가 남긴 일기와 (앞서 언급한) 곤도 시로스케가 남긴 회고록에는 한일 합방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 독살에 깊숙이 연루돼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구라토미 일기는 고종의 죽음에 '윗선'이 개입돼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즉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와 2대 총독 하세가와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는데,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고종에게 무언가를 요구했고 고종이 이를 수락하지 않자 윤덕영, 민병석을 통해 독살을 감행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이다.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요구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종이 공식적으로 한일 합방이 잘 된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라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당시 여러 정황과 증언, 자료들을 토대로 기정사실처럼 받아 들여졌다. 다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만큼 현재에 이것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이 고종이 불미스럽게 죽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후과(後果)를 충분히 감안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며 독살설은 가능성이 희박한 설(說)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든지 간에 고종의 죽음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민족운동의 도화선
고종이 사망한 후 민족의 설움과 분노는 끓어올랐다. 당시 민중들은 순종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고종을 마지막 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렸지만, 어쨌든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한 인물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석연치 않게 숨을 거뒀으니 민중들은 쓰라린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결국 거국적인 3.1 운동의 도화선(導火線)이 됐다.

그런데 이 민족 운동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우선 3.1 운동은 이전의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일부 의병 운동이 조선 왕정 복위 등을 염두에 둔 복고(復古)적인 성격을 나타냈다면, 3.1 운동은 복고적인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해 보다 근대적인 '대한 독립'에 무게를 뒀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이 촉진되기도 했다.

더욱이 이 같은 거국적 민족 운동의 열기는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는 독립 정신을 집약해 우리 민족이 주권 국민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표방하고, 향후 독립 운동을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됐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주권 국민의 대표 기관(정부)으로, 또한 대내적으로는 독립 운동 통할 기구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하며 '광복'(光復)의 촉매제가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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