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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것이 나라에 나쁘다면 참아야지…" 李박사 눈엔 눈물만 [우리가 몰랐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삶과 죽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3.04 18:11

수정 2025.03.04 21:46

(7) 좌절된 귀국, 그리고 요양원으로
"본국 실정이 가실 만한 때가 아닙니다"
1962년 귀국 만류에 분노로 몸져 누워
87세 李박사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가고
임종때까지 요양원에서 고국만 그리워해
본국 귀환이 좌절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지난 1962년 3월부터 1965년 7월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본국 귀환이 좌절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지난 1962년 3월부터 1965년 7월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지난 2022년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을 찾은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연합뉴스
지난 2022년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을 찾은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 연합뉴스

이승만 부부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그를 존경하는 미군의 화이트 대장, 램니처 장군, 맥나마라, 맥아더, 밴플리트 등 많은 장군들이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방문해 위로하고 갔다. 특히 화이트 대장은 이 박사가 하와이에서 병원 혜택을 받는 데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트리풀러 병원에서의 정기 검사와 치료는 물론이고, 훗날 임종 직전까지 많은 의료 혜택을 주선해 주었다.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이 박사는 귀국이 좌절됨에 따른 분노로 몸져 눕기도 했다. 트리풀러 병원의 주치의는 진찰 끝에 이 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이 하와이 총영사를 지낸 오중정씨를 비롯한 하와이 교민사회를 다시 한번 움직이게 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야겠다는 결의가 다져졌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오중정, 최백렬씨 등이 머리를 맞대고 사과성명을 급조해 이 박사 명의로 발표했다. 이로써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적 고려나 조율 따위는 없었다. 최백렬씨는 한국의 날씨를 고려해서 오버코트와 모자를 마련했고, 윌버트 최는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다시 매물로 내놓았으며, 이 박사 가족들의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했다. 곤궁했던 말년의 생활비 일체를 지원해준 윌버트 최에게 이 박사는 자신의 거주지인 이화장(梨花莊)의 토지와 시설 소유권 일체를 양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윌버트 최는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1970년 8월 사망했으며, 그 자제들도 이 박사 부부에 대한 후원이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음을 강조했다).

출발 날짜가 확정되자 이 박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교민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 하와이 유력 일간지 애드버타이저지(紙)는 이승만의 귀국을 축하하는 특별 사설을 게재했다. 1962년 3월 17일 아침, 이 박사는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소파에서 출발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 검은 세단 한 대가 언덕길을 올라오더니 이 박사의 집 앞에 섰다. 뒷자리에서 5·16 군사정권이 임명한 김세원 총영사가 최백렬씨와 함께 굳은 표정으로 내렸다. 잠시 후 방 안에서는 이 박사의 왼쪽에 양자 이인수씨, 오른쪽에 최백렬씨가 앉았고 윌버트 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인수씨 맞은편에 앉았다. 김 총영사는 윌버트 최 옆에 앉게 되어 이 박사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백렬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박사님, 우리나라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되게 하시고 계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이 박사는 '무슨 얘길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김 총영사가 "아직은 본국 실정이 가실 만한 때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 박사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이인수씨는 양아버지의 싸늘해진 손을 계속해서 주무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김 총영사의 말이 다 끝나자 이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아주 조그맣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가는 것이…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하기 바라오…."

그러고는 가냘프게 "나라…나라…" 하며 조국을 찾는 듯 뒷말을 잊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이어 이 박사는 휠체어로 옮겨 앉은 채 부인과 함께 침실로 사라졌다. 이날 이후 이 박사는 두 번 다시는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이인수씨는 자신이 국내로 들어와 이 문제를 직접 풀어보기로 결심하고 그날로 하와이를 떠났다. 귀국이 좌절된 채 아들도 떠난 집에서 87세의 이승만은 뇌출혈을 겪었다. 급히 트리풀러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회복했지만 후유증인 중풍으로 수족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프란체스카 여사야말로 가장 막막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의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우리 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승만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 여사의 간병이 절실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주어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그녀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친정에서도 매월 200달러씩 보내주고 있었다. 한번은 친정에서 종이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 주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종이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이 '종이 옷장'은 지금도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건국한 지 77년째가 되는 오늘날, 대통령과 영부인의 기상천외한 일탈로 나라 전체가 어지럽다. 우리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처럼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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