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원의 기원…울타리에서 채소, 과수 재배
제주 정원의 시초는 진상품 생산 감귤과원
조선시대 민가 텃밭정원…고문헌에서 확인
![[제주=뉴시스] 자연주의 정원인 서귀포시 효돈동 베케 정원. 민간정원과 더불어 여러 공공정원이 조성되면서 생활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제주관광공사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3/202504131326267936_l.jpg)
정원은 누군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공간이자, 자연과 함께 빚어낸 경관이다. 치유와 휴식을 제공하면서 생태계를 품는 그릇, 그리고 이웃과 소통하는 마당이 된다. 제주는 정원을 꾸미기에 이상적인 땅이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 화산섬 특유의 토양, 사계절 변화에 따라 피고 지는 수많은 식물들. 그리고 돌과 바람, 물이 빚어낸 독특한 풍경까지 정원을 이루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섬 곳곳에 담긴 정원을 통해 '제주형 정원(J-가든)'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정원(庭園·garden), 전국 곳곳에 붐을 일으키면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개성 넘치는 민간정원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광역·기초자치단체에서는 정원을 조성하고, 관련 행사를 앞 다퉈 개최하며 주도권 경쟁이 한창이다.
정원은 '집안의 뜰이나 꽃밭'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공원, 도시 숲 등을 포함해 인위적으로 식물을 기르는 장소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확장하고 있다.
정원은 사람의 손길과 자연이 만나는 것이 특징적 요소로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채소, 과일, 약초 등을 재배하는 생산 공간이면서 휴식과 치유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다양한 식물과 곤충이 서식하고 온습도와 빗물을 조절하는 생태적 기능도 수행한다. 심미적 경관창출과 더불어 소통과 협력을 하고, 식물재배를 체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원의 시작은 인류가 식량을 재배하면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울타리로 둘러싸거나, 둘러싸인 공간'이라는 고전전 개념으로 보면 거주지 주변에서 동물 등의 침입을 막는 울타리를 치고 농작물이나 채소, 과일, 약초를 기르면서 정원이 태동했다.
![[제주=뉴시스] 백제 왕의 별궁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못인 궁남지.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못으로 가장 오랜 정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3/202504131326270071_l.jpg)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시대의 궁남지와 통일신라시대의 월지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원은 궁궐정원, 민가정원, 별서(別墅)정원, 사찰정원, 서원정원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궁궐정원은 못을 중심으로 조성됐으며, 사대부들이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한 별서정원은 담양의 소쇄원과 해남 보길도의 윤선도원림이 대표적이다.
![[제주=뉴시스]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의 하나인 담양 소쇄원.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3/202504131326347296_l.jpg)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일본식 정원양식, 서양식 정원양식이 혼재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전통 정원의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주 정원의 고대형태, 밭작물에서 유래
제주의 정원은 어디에서 시작점을 찾아야할까. 제주 역사에 대한 문헌기록이 변변하지 않은 탓에 정원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이 쉽지 않지만 흔적을 뒤지며 깨진 조각을 맞추듯 탐색을 했다.
지난해 2월 호남고고학보에 실린 '제주 예래동취락의 변천-철기시대를 중심으로'(김경주·안재호) 논문을 보면 농경과 관련해 눈에 띠는 내용이 있다.
제주 남부에 위치한 예래동유적은 기원전 350년 전후에서 기원전 10년 전후에 형성됐으며, 이는 송국리형 취락사회에서 탐라국(제주의 고대 왕국)으로 교체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나온 불에 탄 종자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밀, 보리, 콩, 팥 등이 확인된 가운데 기장 중심의 밭작물 재배 가능성이 높게 나타났다.
이후 제주시 외도동 탐라유적에 나타난 석축 등을 감안하면 탐라시대 취락사회에서부터 담을 두르고 밭작물을 재배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제주=뉴시스] 탐라전기인 3~5세기 거점취락 분포도. 서북부 취락에서는 석축, 우물 등의 유적이 나왔다. 학술지인 탐라문화 57호에 실린 '탐라 전기의 취락구조와 사회상' 논문에서 발췌했다.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3/202504131326425722_l.jpg)
◆제주 정원의 시초는 감귤과원
농사를 정원의 고대 형태로 본다면 과일이나 채소 재배를 정원의 시초로 볼 수 있다.
품종은 다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제주의 대표 과일은 감귤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문종 6년(1052)에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오래전부터 감귤은 귀한 진상품이었다.
감귤은 공사(公私)에서 모두 재배했고, 공납의 민폐가 많았다는 내용도 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세조 1년(1455)에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하는데 매우 절실하다…공가에서는 비록 과원을 가졌다할지라도…공은 갑절 들어도 도리어 사가에서 기른 것에 미치지 못하고, 이로 인해 민호에 부과해 공물을 채우는데…"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관가에서 감귤을 재배하지만 민가의 감귤 수준을 따라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상을 위해 민가의 감귤을 거둬들여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런 감귤과원을 유럽 중세시대 수도원 정원의 포도처럼 과수정원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포도원 못지 않게 감귤과원도 정원이 내포한 여러 기능을 한 것이다.
감귤과원은 진상품 생산지에 그치지 않고 산책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충암 김정(1486-1521)은 "감귤과원 아래를 거닐면 아름다운 잎과 청황귤이 무르익어 쪼개져 향기를 내뿜는다"고 표현했다.
제주에서 사사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 적거지에 세운 사묘에서 비롯된 것이 감귤나무 숲에 세운 '귤림서원'이다. 제주 최초의 '서원정원'이라할 수 있다.
![[제주=뉴시스] 탐라순력도에 실린 귤림풍악. 이형상 제주목사가 감귤 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장면이다. (사진=제주도 제공) photo@newsis.com](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3/202504131326434977_l.jpg)
◆탐라순력도, 제주 정원의 귀중한 시각 자료
조선시대 감귤과원 휴양, 위락의 장소로 정원의 기능을 했다는 사실은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에서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는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1653-1733)이 실시한 가을 순력과 다양한 행사를 세밀하게 그리고, 적어서 1703년 완성한 기록화첩이다. 그림 41장과 서문 2장 등 모두 43장으로 구성됐다.
탐라순력도에서 ‘귤림풍악(橘林風樂)’은 제주목 관아에 있는 과원에서 이형상 목사가 부채를 들고 앉아서 기녀들이 거문고로 보이는 탄현악기를 비롯해 장구, 북 등을 연주하는 풍악을 즐기는 장면이다.
귤나무 열매 색이 다른 것은 품종을 구별한 듯하고, 과원 경계를 삼은 돌담에 방풍수로 대나무를 심었다. 과일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단에는 3읍의 감귤 결실수를 당금귤 1050개, 감자 4만8947개, 금귤 1만831개, 유감 4785개, 동정귤 3364개 등으로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형상 목사 당시 관에서 관리하는 과원은 제주읍 29개소, 정의현 7개소, 대정현 6개소 등 42개소에 이르렀다.
또한 '고원방고(羔園訪古)'에서도 이형상 목사가 지금의 서귀포시 염돈마을로 보이는 고둔과원에서 풍악을 듣는 모습을 담고 있는 등 탐라순력도 곳곳에서 과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같은 감귤 과원이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정원이자, 정원의 시초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제주=뉴시스] 탐라순력도의 고원방고. 이형상 제주목사가 지금의 서귀포시 염돈마을로 보이는 고둔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장면이다. (사진=제주도 제공) photo@newsis.com](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3/202504131326431302_l.jpg)
◆민가에서는 텃밭정원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도 집이나 공공건물 주변에서 채소를 기르는 '텃밭정원'이 있었을 텐데 그림이나 문헌기록에서 확인이 쉽지 않다.
겨우 확인한 것이 이건(1614-1662)이 남긴 규창유고 속 '제주풍토기'를 통해서다. 선조의 7남 인성군 셋째아들인 이건은 1628년부터 8년간 제주 유배생활을 했다.
제주풍토기에 따르면 "집에는 생강류의 여러해살이 풀, 그리고 죽순과 달래 및 파 등의 채소가 자라고 있어 맑고 담박한 정치가 높이 살만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면 제주의 정원은 감귤과원을 시초로 볼 수 있으며 서원정원으로는 귤림서원을 꼽을 수 있다. 민가에서는 텃밭정원이 있었지만 기록이 미흡한 상황이다.
제주에서는 '당오백, 절오백'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속과 불교신앙이 번성했다. 원나라 지배시기 번성했던 법화사 등 사찰에서 정원을 꾸몄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쉽게도 조선시대 불교탄압 등으로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고, 명맥도 끊겼다.
* 이 기사는 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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