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신 앞에서는 돼지도, 쌀도, 사람도 모두가 공평하다 [인류학자 전경수의 세상 속으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3.31 18:11

수정 2025.03.31 18:37

필리핀 이푸가오족의 추수제
곡신에 풍요를 비는 의식 '토비아'
제물 바치는 인간의 주술행위 통해
세상 만물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
필리핀 북부의 코딜레라 지역 키앙안에서 추수제에 해당하는 이푸가오족의 '토비아' 의례가 열리고 있다.
필리핀 북부의 코딜레라 지역 키앙안에서 추수제에 해당하는 이푸가오족의 '토비아' 의례가 열리고 있다.
공희용 제물로 바쳐지는 살아있는 돼지 전경수 교수 제공
공희용 제물로 바쳐지는 살아있는 돼지 전경수 교수 제공
'북부 루손 산악지역의 종교와 사회구조'란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이 1969년 독일 쾰른대학에서 나왔고, 저자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1회 졸업생 이종옥씨였다. 사진 한 장 포함하지 않은 문헌연구라는 한계가 있지만, 현지에 가보지도 않고 작성한 논문의 내용이 놀랍다. 이 논문은 지금도 유럽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인용되고 있지만, 한국에선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참으로 부끄럽다.

나는 지난 2013년 필리핀인류학회 100주년 초청강연의 기회에, 문화적 다원주의를 실감할 수 있는 필리핀 북부의 코딜레라 지역을 단기간 답사했다.

이종옥 박사의 논문 배경인 루손섬 북부의 중심인 바기오로부터 동북부 산악으로 이동했다. 스페인과 미국, 심지어 일본의 점령 손길이 고스란히 각인된 곳이지만 부족마다 서로를 인정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끈질기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만나는 찹쌀 재배지대이며, 사면이 45~50도의 급경사에 조성된 다랑이논들로서 자칫 잘못하면 굴러떨어진다. 실제로 1981년 스탠퍼드대 인류학과 미셸 로잘도 교수가 37세의 나이에 현지에서 추락사한 적도 있다.

키앙안에서 추수제에 해당되는 이푸가오족의 '토비아(tobia)' 의례 참관은 인류학도에겐 행운이었다.

의식용 제구들을 모시고 있는 동네의 창고가 제장이고, 한낮의 가장 더운 시간에 행제(行祭)한다. 창고는 전형적인 고창(高倉)으로 수확한 쌀을 저장하는 형태와 동일하다. 이층 한 칸의 목조 건물로 사다리를 걸고 오르내린다. 땅바닥에 대나무로 엮은 자리를 깔았고, 감실로 사용되는 창고에 모셨던 신체인 '불룰(bulul)'이 내려져서 제장의 한쪽에 안치되었다. 불룰은 아주 단단한 자단목으로 만든 인물조각의 좌상과 입상이 있는데, 보통 40~75㎝ 길이다. 불룰의 형태는 이푸가오 무당인 뭄바키(mumbaki)가 의식을 할 때 쭈그리고 앉은 자세나 마찬가지다. 필리핀 남부 지방에서는 입상이지만, 북부에서는 무릎을 굽힌 굴신 좌상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풍요를 담보하는 곡신(穀神)이다.

이푸가오에는 곡신에 성별이 있다. 남신은 '푼홀다얀(punholdayan)', 여신은 '부얀(buyan)'이다. 이것과 관련해 이푸가오 여성들의 이름에 부얀이 흔한 것은 여성의 신성성을 의미한다. 의식용 그릇인 큰 손잡이가 달린 목제의 '푸남한(punamhan)'과 대형 술잔인 '키나후(kinahu)'도 준비되었다. 불룰과 비슷하지만 크기가 작은 '히팍(hipag)'은 이층의 깜깜한 고창 속에 있는데, 이것은 전쟁 주물(呪物)이다. 히팍이 있는 곳에는 과거 목베기 시절에 베어왔던 해골의 하악골이나 악어 이빨들을 장식으로 걸어 두었다. 오랜 관습이었던 목베기가 금지되면서 히팍과 관련된 의례들은 사라졌다.

두명의 뭄바키와 여섯명의 악사들이 불룰과 술 항아리인 '굴링(guling)', 그리고 제기들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았다. 술 항아리 입구에는 술을 거르는 국자와 야자잎이 꽂혀 있다. 술은 찹쌀 술이다. 항아리 속에서 액체만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야자잎을 거름장치로 꽂았다. 술국자의 손잡이는 사람 얼굴 모양이 조각되었다. 악사들은 '잉기-잉(ingi-ing)'이라는 피리(입으로 부는 것과 코로 부는 것이 있음)와 작은 북 '디딥푸(diddpu)', 큰 북 '솔리바오(solibao)', 목제 타악기인 '파퉁반기방(patungbangibang)' 등을 연주한다. 제장의 의식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은 남자들뿐이며, 제관 중에는 사내아이도 포함되었다. 밖에서는 공희용 제물인 수확된 쌀 뭉치와 결박된 살아 있는 돼지 그리고 살아 있는 닭 세 마리가 운반돼 왔다. 깃털이 흰 닭 한 마리와 붉은 닭 두 마리다. 동네 사람들이 고창의 주변으로 대거 모여들었고, 아이들이 주변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마당의 한쪽에서는 불을 피우고 커다란 솥이 걸렸다. 한 뭄바키가 술독에서 술을 꺼내어 키나후에 담고 주문을 외움으로써 제례는 시작했고, 흰 닭의 목을 찔러서 받아낸 닭 피를 코코넛 잔에 담아서 불룰에게 바치기 위해서 푸남한에 놓는다. 그 옆에는 대나무로 만든 의식용 주물인 '아유딩(ayyuding)' 두개가 있다. 아유딩의 역할은 오염 방지와 공희물의 신성화에 있다. 붉은 닭 두 마리는 털만 제거된 채로 납작하게 해부되었다. 두명의 뭄바키는 번갈아 가면서 주문을 외우고, 악사들은 신을 부르는 소리를 부지런히 연주한다. 그 사이에 한쪽에서는 돼지 멱 따는 소리의 도살이 진행되었고, 돼지의 간과 방광을 불룰에게 바치는 것으로 제례는 절정에 달했다. 주변을 휘돌아 치면서 놀던 아이들도 조용히 제장으로 모였다. 돼지의 몸에서 꺼낸 간과 방광을 점검한 뭄바키의 신탁이 내렸고, 한 사람이 그 내용을 참가자들에게 큰소리로 고한다. "파슬립텐!"이라고 외치자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신탁은 세 가지로 해독되는데, '파슬립텐(paslipten)'은 방광과 간의 형태와 무게 및 빛깔과 위치에 있어서 건강한 상태로서 좋은 징조를 말한다. '나엑반(naekban)'은 방광이 간의 '입켓'(ipket, 소엽간정맥)으로 둘러싸여서 방광이 뻣뻣하고 처진 상태인 나쁜 점괘다. '신미슬림릿(sinmislimlit)'은 중간 상태로 판정된다. 의례와 주술의 전문가인 뭄바키는 돼지와 닭의 해부학에 대해서 아주 정밀하고 구체적인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 상태를 읽어내는 지혜가 문화전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희용으로 선택됐던 돼지와 닭이 건강하게 길러진 이푸가오의 산물이며, 선택된 제물들이 인간의 풍요를 위한 것이라는 공리주의적 해석이 설 자리는 없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에 공평한 신이 존재하는 한 돼지와 닭도 풍요로운 삶이 보장돼야 한다. 인간 행위의 매개로 돼지와 닭은 신의 세상으로 접신하는 현상학적 해석의 문을 여는 작업이 인류학자의 소명이다. 그것이 공양이라는 현상이다.

두 시간이 넘는 제례가 종료되는 동안 해체됐던 돼지는 솥에서 익고 있었고, 여인들이 제장으로 들어와서 음식 나누는 준비를 한다. 바나나 줄기 한 통이 잘려 왔고, 내부의 속살은 샐러드용이고, 넓적한 잎사귀는 종류별로 음식을 펴는 그릇 역할을 하고, 반원으로 잘린 줄기는 참가자에게 음식을 배분하는 개인식판 역할을 한다. 의식이 끝나면 술과 고기를 나누고 춤을 추는 동네사람의 공식(共食, com mensa) 판이다. 공동체는 사람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이 매개가 되어서 모든 것이 함께 원활히 돌아가는 현상이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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