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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아래로부터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다 '동학농민혁명'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9.18 18:20

수정 2021.09.19 10:08

<정변의 역사 ⑱> 
조선사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 
전봉준, 김개남의 동학농민혁명 전말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
[파이낸셜뉴스] "...(중략)...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관군 좌선봉장 이규태 증언 中

19세기 말 이전까지 조선에서 발생했던 개혁이나 혁명은 지배층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개혁, 혁명이 전부였다. 근대(近代) 사회에 들어와 발생했던 대표적인 개혁 운동인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개혁(甲午改革)도 소수 지배층의 주도로 위로부터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하층부에 있는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바람(토지 개혁 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외세의 침략과 내정의 문란 등으로 국가의 앞날이 대내외적으로 불투명하던 1894년에, 그동안 조선 역사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성격을 띤 혁명이 발생했다. 바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말 그대로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중심이 돼 일어난 반봉건(反封建) 개혁운동이었다. 농민들은 그 당시 사회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개선 방안을 고스란히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담아 시행하려고 했다. 핵심은 전 근대 사회에서 불평등한 사회 관계를 규정했던 신분제(身分制) 폐지와 토지의 균등 분배 등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는데, 이에 맞서 분연히 들고 일어나며 반외세(反外勢) 민족운동을 지향했던 것이다. 무능한 민씨 정권이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이를 대신해 농민군이 국권 회복을 위해 앞장서 싸웠던 셈이다.

다만, 동학농민혁명은 한계도 내포하고 있었다. 무기 등에서 충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일본군 및 관군과 맞선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사회 개혁을 지향하면서도 구(舊)세력이었던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는 대원군의 '감국'(섭정)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농민군이 대원군의 영향력에 어느 정도 의지를 했고 대원군은 농민군을 이용해 다시금 권력을 잡으려 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농민군 내부에서 완전히 연대하지 못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단 조직인 남접(南接) 내 온건파(전봉준, 왕조 인정)와 강경파(김개남, 왕조 부정) 간의 노선 갈등, 그리고 남접과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단 조직인 북접(北接) 간 대립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은 결국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귀결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이 당대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이후의 역사에서 적지 않게 계승, 발전됐다. 반봉건 노선의 핵심이었던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 때 상당 부분 수용됐고, 항일로 대변되는 반외세 노선은 의병 투쟁과 무장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대항해 역사 발전의 '주체'(主體)로 등장했다는 점은 이후 거국적인 민족 운동인 '3.1 운동'으로 계승되기도 했다. 조선사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전말을 되돌아봤다.

■동학의 기원
동학(東學)은 1860년 4월 경주의 몰락양반 후손이자 서자였던 최제우에 의해 창시됐다. 동학은 서학(西學)과 같은 하늘의 도(道)를 추구하지만, 동쪽에서 태어난 종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신병체험과 유사한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했고, 이 체험을 통해 '한울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를 깨우치기 위해 성심껏 한울님을 모셔야 한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설파했다. 시천주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조(敎祖)인 손병희 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재해석됐다. 이 같은 동학 사상은 한문책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한글 가사체 책인 용담유사(龍潭遺詞)로 정립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이전과는 색다른 사상을 표방한 동학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고, 시간이 갈수록 동학에 가입하는 농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동학은 각 지역의 교도들을 관리, 통솔할 책임자로서 '접주'(接主)들을 임명했고, 그 접주들이 관리하는 지역은 '접소'(接所)라고 불렀다. 교단 조직은 대표적으로 전라도의 남접과 충청도의 북접이 있었는데, 이 두 개의 조직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남접에는 가난한 하층 농민이 많았고, 북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富民)이 많았다. 남접은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높아 조정과 외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성향을 띄었고, 북접은 사회 개혁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동학의 세력이 커지면서 가장 큰 위기감을 느낀 것은 당시 조정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이었다. 결국 대원군은 세상 사람들을 속여 정신을 홀리고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뒤집어씌워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했다. 교조가 허무하게 죽자 동학교도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동학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고, 되레 교도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학교도들은 1892~1893년에 2대 교조였던 최시형의 주도로 조정에 최제우의 원통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교조신원(敎祖伸寃)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동학교도들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관련 집회를 가졌다가 전라 감사의 거부로 실패한 후에 한양으로 대거 올라와 왕에게 복합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조정은 일단 동학교도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척하면서 회유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는 기만책에 불과했다. 대원군에 이어 권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궁궐 앞에서 복합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색출해 탄압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3만 여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북도 보은(報恩)에 집결해 돌로 성을 쌓고 대규모 집회를 벌이며 결기를 다졌다. 특히 이전까지 단순 종교적 구호를 외치는데 그쳤던 동학교도들은 이 보은 집회 때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일본 및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떨치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등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서 점차 농민혁명의 성격을 띄어갔다.

■탐관오리 탐학, 최초 봉기
동학농민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을 시점에 조선의 상황은 매우 악화돼 있었다. 사회적으로 부패가 심화돼 국가 재정의 근간이었던 전세, 군포, 환곡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나타났고, 돈이나 재물로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도 성행했다. 일본에 배상금 지불 등의 명목으로 민중들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무능한 민씨 정권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세우려하기는커녕 청나라와 밀착해 기득권 지키기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동학혁명을 촉발하게 만드는 사건이 1894년 전라북도 고부에서 발생했다. 2년 전 부임한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탐관오리가 전횡(專橫)을 일삼아 그동안 쌓여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당시 조병갑은 농민들을 무리하게 동원해 만석보(萬石洑)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여기에서 과도한 수세(收稅)를 징수했다. 또한 자신의 부친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 건립을 명분으로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외에 여러 농민들에게 온갖 트집을 잡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농민들은 조병갑의 전횡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당시 남접을 이끌었던 접주 전봉준을 앞세워 조병갑에게 세금을 낮춰 달라는 등의 요구를 강력하게 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 요구를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주모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의 이름을 적은 통문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만들면서 비로소 봉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동지들과 함께 조병갑 제거와 군기창(軍器廠) 점령, 전주영 함락 등을 담은 구체적인 행동 강령들까지 제정했다. 이후 1894년 2월(음력)에 비로소 봉기해 고부 관아를 습격했고, 조병갑이 불법적으로 수탈했던 수세미 등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반환했다. 이렇게 최초 봉기가 성공한 후 전봉준 등은 일단 해산했다.

고부 봉기 소식을 접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즉시 진상조사를 했고,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 등을 기반으로 조병갑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조정은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이라는 사람을 새로이 고부군수로 임명했다. 아울러 농민들을 달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런데 이용태는 사태 수습은커녕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전봉준 등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차 동학농민혁명, 반봉건
이에 대응해 1894년 4월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현에 모여 창의문(무장동학포고문)을 발표했다. 창의문에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일본을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등을 나타내는 보국안민 및 외세 배격 등이 담겼다. 이를 위해 주변 지역의 농민들이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내 1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라간 것이다. 이후 전봉준은 백산(현재 전북 부안)에서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됐고, 손화중과 김개남은 전봉준을 보좌하는 총관령(總管領)이 됐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비로소 농민군이 제대로 된 진용(陣容)을 갖췄다. 이 때 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무려 8000여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 사관은 이 광경을 '앉으면 죽산(농민군이 앉으면 손에 든 죽창만 보이고), 서면 백산(다 일어나면 흰 옷 입은 사람만 보인다)'이라고 묘사했다.

동학농민군의 첫번째 목표는 부안 관아였다. 농민군이 이 곳을 습격해 손쉽게 점령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특수한 지역을 수비하기 위해 그 부근 장정을 뽑아 편제한 군사들인 별초군(別抄軍) 및 보부상이 중심이 된 관군으로 하여금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기가 드높은 농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황토현(현재 전북 정읍)에서 관군 등은 대패했다.

이 소식은 조정에 급히 전해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민씨 정권은 무장인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의 경군 800여명을 전주성으로 파견했다. 이 군사들은 외국 교관에게 훈련을 받은 강한 군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홍계훈의 경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후 사기가 저하된 탈영병들이 속출했다. 이에 홍계훈은 조정에 증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황헌주가 이끄는 총제영의 중군이 추가로 파견됐다. 증원군 파견 소식에 고무된 홍계훈은 경군을 이끌고 전주성을 나와 농민군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추격 도중에 홍계훈은 황헌주의 중군과 합세했고, 마침내 장성 남쪽 황룡촌(黃龍村)에서 조정의 중앙군과 농민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초반에는 비교적 우수한 전력을 가진 중앙군이 우세한 듯 했지만, 농민군은 사력을 다해 반격했고 전세(戰勢)는 차츰 농민군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중앙군은 농민군에 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홍계훈의 경군이 있었던 전주성으로 쳐들어갔다. 예상 외로 강력한 농민군에 놀란 전주성 내 관군들은 더 이상 전주성을 사수하지 않고 급히 도망쳤다. 이로써 1894년 4월 27일에 농민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13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한 철저한 징계와 개항 후 나타난 교역의 모순 제거 등이 담겼다. 당시 개항 후 침투해 온 외국 상인 등으로 인해 미곡의 국외 유출과 더불어 물가 폭등이 나타나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개혁안은 사회 변화를 바라는 농민들의 여망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13개조 폐정개혁안에는 국태공(흥선대원군)의 국정 간여를 통한 민심 회복이라는 조항도 담겨있었는데, 이는 농민군이 구 세력으로 여겨졌던 대원군과 손을 잡은 것으로서 본래 개혁을 지향했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실제 대원군은 농민군의 봉기 초기부터 이들과 접촉하며 자신의 권력 회복을 도모하려 했고, 농민군 내 온건파는 대원군의 영향력에 어느 정도 의지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에 전주성 인근에서는 이 곳을 탈환하려는 관군과 사수하려는 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선제 공격을 했음에도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런 가운데 다급해진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파병된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했고, '텐진조약'으로 동등한 파병권을 획득한 일본군도 제물포에 상륙했다. 민씨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서슴없이 외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농민군은 전주성 인근 전투에서의 패배로 기세가 한풀 꺾였고, 청나라와 일본 군대의 조선 주둔에 빌미를 주는 것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은 홍계훈을 앞세워 탐관오리들을 벌할 테니 농민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했다. 전봉준 등은 고심 끝에 24개조 폐정개혁안을 제시했고, 이를 조정에서 받아들이면 해산할 것이라고 답했다. 24개조 폐정개혁안은 앞서 제시된 폐정개혁안이 보다 구체화된 것으로, 농민들의 봉기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탐관오리 숙청, 매관매직 청산 등 정치기강 문란의 시정을 주장했고, 경제적으로는 전세·군포·환곡 등 삼정의 문란 시정과 개항 후 발생한 외국 상인 및 독점 상인들의 횡포를 금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 같은 개혁안을 조정에서 받아들임으로서 1894년 5월 7일에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해 해산했다. 전주화약 후 조정과 농민들은 전라도 지역의 개혁 사무를 관장할 자치 기구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했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시행에 착수했다. 집강소를 통한 폐정개혁은 이전의 폐정개혁들이 수정, 보완돼 12개조로 재정립됐다. 주요 내용들을 보면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 개선, 청춘과부(靑春寡婦) 개가 허용, 토지의 평균 분작(分作), 일본과 간통(奸通)하는 자 엄징 등이 있었다. 이는 토지 개혁 등이 담겼다는 점에서 갑신정변 때 제시된 혁신정강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2차 동학농민혁명, 반외세
하지만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은 순조롭게 시행되지 못했다. 엄연히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파격적인 반봉건 개혁안이 담긴 만큼 조정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당초 농민군과 했던 약속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 했다. 더욱이 당시 국내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텐진조약에 근거해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급기야 일본군이 무력을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민비를 유폐시킨 '경복궁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김개남이 중심이 된 농민군 내 강경파들은 1894년 8월 말에 남원에서 재봉기를 결의했다. 초반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전봉준도 9월 초에 삼례에서 재봉기했다. 이 때 집강소를 통해 모여든 농민군은 수만명에 이르렀다. 반외세, 항일(抗日)로 대변되는 2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라간 것이다. 2차 혁명 때는 참여 세력들이 1차 혁명 때에 비해 눈에 띄게 불어났다. 1차 혁명의 경우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의 남접만 참여했는데, 2차 혁명 때는 최시형이 이끄는 충청도의 북접도 참여했다. 당초 북접은 남접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사회 개혁보단 종교 활동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항일이라는 더 큰 대의 앞에 남접과 북접이 한데 뭉친 것이다.

남·북접의 농민군은 논산에서 합세했고, 곧이어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로 북상하려 했다. 그런데 이 때 조정은 농민군의 대의에 동조하기는커녕 일본군과 합세해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참담한 결정을 내렸다. 민씨 정권은 외세와 협력하는 한이 있더라도 농민군이 표방하는 반봉건의 싹을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다. 농민군 대 일본군·관군 연합군은 11월에 목천 세성산에서 첫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북접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복명이 전사했고, 농민군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후 일본군 및 관군은 농민군보다 먼저 공주로 진입했고, 농민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우금치와 이인, 효포 지역 등에 진을 치고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농민군이 논산과 노성을 거쳐 공주로 들어오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경천으로 해서 판치를 넘어 효포, 웅치 지역을 경유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인을 거쳐 우금치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이 때 농민군은 노성에서 두 부대로 나눠졌는데, 전봉준이 이끄는 한 부대는 판치, 효포, 웅치로 공주의 동쪽을 공격하고, 나머지 부대는 이인으로 진격해 공주의 남쪽을 공격하기로 했다.

첫 전투는 이인 지역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농민군은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했다. 그러나 효포 지역 공략은 관군의 반격으로 좌절됐고, 한동안 공주를 사이에 두고 농민군 대 일본군 및 관군이 대치하는 형국에 들어갔다. 이후 농민군은 웅치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반격에 당해 공주 남쪽으로 퇴각했다. 농민군의 사기가 저하될 즈음 전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의 농민군이 합세했다. 농민군은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했고, 판치 방면 공략에 나서 관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이 때 관군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우금치(牛禁峙)로 퇴각했다.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우금치로 진격해 일본군 및 관군과 조선의 운명을 건 일대 혈전(血戰)을 벌였다. 우금치 전투는 무려 일주일동안 50여 회에 걸쳐 치러졌다. 농민군은 일본군 및 관군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기들을 가졌지만,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반외세와 반봉건이라는 명확한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이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근대식 무기 앞에 농민군은 점차 한계를 드러냈고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일본군의 강력한 기관총은 수많은 농민군을 마치 학살하다시피 했으며, 농민군의 시체는 산처럼 쌓였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전봉준은 관군에게 함께 힘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 싸우자고 간절히 호소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군은 논산 방면으로 퇴각했다. 우금치 전투에 참전한 농민군 외에 다른 농민군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지만, 이 역시 역부족이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퇴각했다. 청주로 북상했던 김개남의 농민군도 일본군 및 관군의 공격을 받아 전주를 거쳐 태인 방면으로 퇴각했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주력부대는 본거지인 충주에서 일본군 및 관군의 공격을 받은 후 완전히 해산됐다. 이 때 농민군을 공격한 것은 비단 일본군 및 관군 만이 아니었다. 농민군의 사회 개혁을 두려워했던 양반층으로 구성된 민보군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잔혹하게 공격했고, 결국 모든 농민군은 재기 불능의 궤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을 최일선에서 주도했던 전봉준은 순창에서 은밀히 재기를 모색했지만,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12월에 관군에 체포됐다. 전봉준은 이듬해 4월 손화중, 김덕명 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다른 녹두장군이었던 김개남도 옛 친구인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돼 처형됐다. 1894년 2월 고부 봉기를 시작으로 1년 여 간 지속됐던 동학농민혁명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계승, 발전
비록 외세의 개입 등으로 조선사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반봉건, 반외세의 가치는 이후의 역사에서 계승, 발전됐다. 무엇보다 폐정개혁안에 담긴 신분제 폐지 요구는 갑오개혁 때 상당 부분 수용됐다. 문벌 제도, 반상 차별, 죄인 연좌법 폐지와 조혼 금지 및 과부의 개가 허용 등이 이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수백년 간 이어져 온 대표적인 봉건적 관습들이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 투쟁의 근간이 됐다. 우선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세력들이 중심이 돼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다.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며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나아가 항일 무장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성격은 1919년에 발생한 '3.1 운동'으로 계승되기도 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대항해 역사 발전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이후의 3.1 운동은 상당한 연계성을 갖고 있고, 우리나라 역사 발전 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를 받는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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