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업과 옛 신문광고

[기업과 옛 신문광고] 만남의 장소, 코스모스백화점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3.13 18:23

수정 2025.03.13 18:23

[기업과 옛 신문광고] 만남의 장소, 코스모스백화점
유행의 일번지이자 서울 최고의 번화가인 서울 명동도 점점 쇠락하고 있다. 그 시절 명동의 터줏대감으로서 '명동백작'으로 불린 소설가 고 이봉구의 글에도 나오듯이 명동은 1970년대까지 다방과 술집들이 즐비한, 문인과 예술인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오상순, 박인환, 변영로, 윤용하, 천상병, 김수영 등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작곡가들이 명동 뒷골목을 누볐고 '위스키 시음장'의 싸구려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명동은 또한 청바지와 통기타, 장발로 대변되는 청춘 문화가 만개했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 장노년층이 되었을 그들은 아직도 클래식 선율이 흐르던 '르네상스' 고전음악감상실과 생음악과 생맥주가 흘러넘치던 '오비스캐빈'을 기억한다.

명동의 낭만과 젊음은 어디론가 가버렸고, 이제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일본 도쿄 신주쿠만큼이나 화려했던 야경도 빛이 바랬다.

명동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백화점이 하나 있었다. 1970년에 문을 연 코스모스백화점이다. 5층 규모에 영업 면적이 약 6000평이었던 코스모스백화점은 개장하자마자 단숨에 화신과 신세계, 미도파를 밀어내고 국내 최대 백화점으로 떠올랐다. 명동 초입의 위치는 그야말로 금싸라기 중의 금싸라기였다. 종로의 종로서적처럼 명동을 찾는 젊은이들이 약속 장소로 정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현재 그 자리에 있는 '눈스퀘어'라는 쇼핑몰도 코스모스를 이어서 만남의 장소가 되어 있다.

코스모스백화점 자리는 원래 극장이 있었던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 명동 입구에는 아치형 '한독약품' 광고 간판이 설치돼 시선을 끌었다. 밤이 되면 네온사인 불빛이 명멸하던 명동의 상징물이었다. 명동극장은 그 간판 좌우에 있었다. 길도 지금보다 좁았는데, 서울시는 명동과 남대문로의 노폭을 넓히고 가로정비 공사를 해서 지금처럼 번듯한 거리로 만들었다.

극장을 허물고 백화점을 완공한 때가 1970년 10월이었다. 실제 개점일은 11월 15일이었다. 코스모스백화점은 금세 '쇼핑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동아일보 1972년 12월 16일자·사진). 1974년 큰불이 나기도 했지만 다시 수습해 영업을 재개했다.

코스모스백화점 지하 1층에는 '코스모스 수퍼마켓'이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같은 건물이 있는 것과 같다. 지하에는 '주간 경양식, 야간 비어홀'이라고 광고를 하던 코스모스회관도 있었다. 코스모스회관은 큰 무대가 있는 극장식 맥주홀로 1980년대 초까지 유명한 연예인들의 공연이 매일같이 열렸다.

호황을 누리던 코스모스백화점은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서히 경영난에 빠졌다. 1970년대 말의 불경기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1979년 초대형 롯데백화점이 문을 연 것이 타격을 주었다. 훨씬 더 크고 현대적인 롯데로 고객들이 몰려갔고 코스모스는 외면을 받았다.

결국 1991년 부도가 나 이듬해 '코스모스 플라자'로 재개장했지만 불과 두달 만에 문을 닫았다. 그 후 '아바타몰'이라는 쇼핑몰이 그 자리에 들어섰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신세대를 겨냥한 눈스퀘어는 코스모스의 영화를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 강타로 휘청거리다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고 한다. 초특급 위치이면서도 들어서는 상가마다 줄줄이 망해 코스모스백화점 자리는 '저주받은 상권'으로 불렸다.

신세계백화점의 바로 옆 남대문시장 쪽에는 1976년 개점한 새로나백화점이 있었다. 연면적이 약 5000평으로 작지 않은 백화점이었다. 상동교회라는 교회 건물 안에 있었고, 교회가 직영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이었지만 서민을 상대로 한 중저가의 물품을 팔던 곳이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까지 영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다. 교회 건물의 겉모습은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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