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진짜 소레나" "야바이인데" 日 또래문화로 번지는 한일합성어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9.04 17:26

수정 2022.09.06 10:48

한국어 배우는 일본 10대들
케이팝 인기가 언어까지 확산
도쿄 세종학당 다니는 여고생 "한국어 관련 직업 갖고싶어"
'まじ 미안해' '알았어です ' 등 양국 말 섞어 은어처럼 쓰기도
대학에선 중국어 인기 넘어서
수강생 300명 달하는 수업도
현 정치상황과는 거리 있지만
10·20대가 사회 주축 됐을땐
양국 관계 도움된다는 의견도
지난 3월 일본 도쿄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일본 중고생 대상 한국어 말하기 대회인 '함께 말해봐야 한국어' 대회에 참가한 일본 학생들이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국어 촌극을 선보이고 있다. 주일 한국문화원 제공
지난 3월 일본 도쿄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일본 중고생 대상 한국어 말하기 대회인 '함께 말해봐야 한국어' 대회에 참가한 일본 학생들이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국어 촌극을 선보이고 있다. 주일 한국문화원 제공
【 도쿄=조은효 특파원】 "한국어를 공부한 지는 1년 정도 됐어요. 학교 친구들도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배고파', '다음 수업 싫어', '그러니까…', 이런 말들을 한국어로 주고 받곤 해요." 지난 8월 31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 소재 주일 한국문화원 세종학당에서 만난 고교 1학년 다나카 미나미 양(15·가명)은 "케이팝(K-POP) 아이돌그룹 세븐틴 멤버들의 말을 자막없이 이해하고 싶어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흔히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일본인들에게 나오는 '안뇽하시므니까'식의 발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학습기간이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미나미 양의 발음은 꽤 자연스럽고 정확했다. 어휘 구사력도 뛰어났다.

코로나19 확산기, 학교들은 상당기간 휴교를 실시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케이팝 스타들의 영상을 수시로 보게 됐고 한국말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지게 됐다고 했다.

한국어를 공부해서 좋은 점을 물으니 "세븐틴이 실시간 방송을 하거나 하면, 특히 좋아하는 멤버 조슈아의 말을 자막없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미소를 지었다.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이미지이냐'고 질문하니 "화장, 패션 등 젊은 세대들의 유행과 문화의 발신지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는 "향후에 한국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며 "대학 입학 후 한국에 가서 유학도 하고 싶고, 한국 친구도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미나미양의 어머니(46)는 "무엇보다 한국어를 한국 사람들처럼 잘 하고 싶다"는 미나미양의 야무진 꿈을 듣고는 "학교 성적도 매우 우수하다"며 대견한 눈빛으로 딸을 바라봤다.

"진짜 소레나" "야바이인데" 日 또래문화로 번지는 한일합성어 [글로벌 리포트]
■日 10대, 한일 합성어 구사

최근 미나미 양처럼 한국어에 관심이 많은 일본의 10대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일본 대학의 한 한국인 교수는 "일본 지인의 중학생 딸에게 아이돌그룹 '블랙핑크' 관련 상품(굿즈)을 선물했다가 '일본에서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인데 감사하다'는 내용의 장문의 한국어 편지를 받아 깜짝 놀랐었다"고 했다.

한국 정부 공인 한국어 능력 시험(TOPIK)의 지난해 10월 일본 지역 응시자는 약 1만6000명이다. 역대 최다였다. 10대와 2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세종학당이 지난달 26일 마감한 작문 콘테스트에는 3217건이 쇄도, 이 역시 2010년 대회를 시작한 이래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BTS와 한국어 공부를'이란 강좌는 수강 경쟁률이 매우 치열하다.

일상적으로 간단한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말하는 '한일 합성어', 일명 '한일어'가 일본 10대들의 '또래문화'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가령 한국어의 '진짜'와 일본 젊은이들이 즐겨쓰는 '소레나(それな 그래)를 합쳐 "진짜 소레나(진짜 그래)"라던가, 역시 일본어 야바이(やばい 대박)와 한국어 '인데'를 합친 "야바이인데(やばい+인데, 대박인데)" 등이다. 전자는 일본 개그맨 '스쿨 존'이 사용해 유명해졌고 후자는 케이팝 걸그룹 아이즈원(IZ*ONE)이 말하면서 10대들의 유행어가 됐다. 이 외에도 "마지 미안해(まじ+미안해=정말 미안해), "알았어데스"(알았어+です= 알았어요), "진짜? 야바이(진짜? 대박!) 등의 말들이 있다. "맵다까라 키오쯔케떼(매우니까 조심해!) 등 기존 일본어 문장에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일본 여고생 등 10대들에게 한일 합성어가 일종의 은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 교육 전문가, 한국어 학습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최근 1~2년간 '코로나 감염 확산기'가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폭됐다"고 분석했다. 코로나 확산기 칩거 기간, 유튜브·넷플릭스 등으로 케이팝, 한국 드라마 등 다양한 영상물을 접하는 시간이 증가했고 한국어에 노출되는 시간도 늘게 됐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케이팝 스타들의 말을 알아듣고 싶다는 일본 10대들의 적극성도 가미됐다. 그러다보니 "진짜" "맵다" "미안해" 등 간단한 일상어들을 쉽게 구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케이팝 등 한국 대중문화 선호 현상→한국어 관심→노출빈도 증가·연예인 등의 사용→또래 문화 확산'이란 경로를 밟은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3월 일본 도쿄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일본 중고생 대상 한국어 말하기 대회인 '함께 말해봐야 한국어' 대회에 참가한 일본 학생들이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국어 촌극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주일 한국문화원 세종학당
지난 3월 일본 도쿄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일본 중고생 대상 한국어 말하기 대회인 '함께 말해봐야 한국어' 대회에 참가한 일본 학생들이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국어 촌극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주일 한국문화원 세종학당
일본 도쿄 세종학당 어린이 대상 강좌. 주일 한국문화원
일본 도쿄 세종학당 어린이 대상 강좌. 주일 한국문화원
■"日대학생, 한국어가 중국어 제쳐"

일본 현지 대학에 출강하면서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경력 20년차의 베테랑 강사 김민수, 이남금, 김성은씨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남금 강사는 "'한국이 어느 면에선 일본보다 선진국'이란 대학생들의 말을 들을 때 변화상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도카이대 어학교육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민수 박사(언어학) 등은 10대들의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20대로 넘어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6년 새, 대학 교양이수 과목(제2외국어) 수강 인원을 볼 때 한국어 강좌가 중국어를 제치고 올라섰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코로나 확산기를 거치면서 한국어 강좌 인원이 2배 이상 증가했다. 도카이대의 경우 재학생 약 3만명 가운데 한 학기당 약 3000명(한국어, 한국문화 중복 수강 합산), 10% 정도가 한국어를 수강한 것으로 파악한다"고 말했다. 이는 일본 수도권 여타 대학에서도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어 수강 인원이 폭발, 한 강좌에 200~300명까지 들어와 분반을 실시해야 할 지경"이라는 것이다.

왼쪽부터 김민수, 이남금, 김성은 세종학당 강사. 경력 20년 수준의 베테랑 강사로, 일본 각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사진=조은효 특파원
왼쪽부터 김민수, 이남금, 김성은 세종학당 강사. 경력 20년 수준의 베테랑 강사로, 일본 각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사진=조은효 특파원

더 놀라운 것은 대학 1·2학년 강의(교양이수 과목)에 들어가보면 과거와 달리 수강생의 약 10%정도는 이미 상당 수준의 한국어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개는 독학으로 공부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민병욱 세종학당 팀장은 "실제 수년간 한국어 실력이 출중한 학생들이 늘면서 한국어 말하기 대회의 심사기준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설명했다.

한국어 교육과 함께 한일 간의 역사를 설명하면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싫어하는 것 아니냐" "알려줘서 고맙다"는 등의 현장의 반응도 소개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흥미로 한국어를 배우고 일부는 다시 한국 유학,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고리를 이룬다고 한다. 10대에 노출된 언어 환경을 통해, 상대국에 대한 이해와 접근의 통로를 넓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류가 인기를 끈다고 해서 그것이 오른쪽으로 달려온 일본정치에 즉각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 '한류는 한류이고, 과거사는 과거사'라는 식이다.
일본의 한 한일관계 전문가는 "지금의 10대, 20대들이 향후 20년 뒤 일본 사회의 주축이 될 때 이 넓은 간극도 점차 좁혀져 갈 것"이라며 기대를 걸어봄직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과거 일본 정계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와 달리 리버럴한 합리주의자로 불렸던 그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은 약 30여년 전 한일 양국의 미래상에 대해 "한일 양국 국민이 어느 일방이 아닌 서로의 언어를 말할 때"라고 말했다.
미래상의 윤곽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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