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동일칼럼

[노동일의 세상만사] '우아한 위선'에서 '정직한 야만'의 시대로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3.17 18:11

수정 2025.03.17 18:11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서
각자 도생하는 힘의 시대로
동맹 아닌 스스로 길 찾아야
노동일 주필
노동일 주필
미국 제33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부통령이 된 지 82일 만에 갑자기 대통령이 되었다. 1944년 선거에서 승리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사망하는 바람에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다.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전임자 루스벨트와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가려 과소평가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역사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의 운명이 걸린 역사적 결정을 수차례 내린 사실이 재조명된 때문이다. 트루먼은 1945년 8월 일본에 원폭 투하를 결정,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다.

종전 후 황폐해진 유럽을 재건하기 위해 마셜플랜을 시행하고, 소련의 위협에 대응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1949년)도 트루먼의 주도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 결정을 내린 대통령도 트루먼이다.

마셜플랜은 유럽에 돈 퍼주기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한국전 참전도 여론의 반대가 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여기고,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었다. 1950년 7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한국전 참전의 배경을 설명했다. "남한은 미국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2025년 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미국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80년, 소련 해체 후 30여년 지속된 미국 유일의 국제질서가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당신들에게 3500억달러(약 511조6300억원)를 주었다"고 젤렌스키를 질책했다. 그는 강대국에 침략당한 약소국의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 외국 전쟁에 개입하여 미국인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상황을 끝내려는 생각만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기후협정,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인권이사회(UNHRC) 등 유엔 산하 기구와 협약 탈퇴를 지시했다. 미국의 유엔 참여를 중단하는 내용의 법안(DEFUND Act)도 제출되어 있다. 트럼프는 유럽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사용하지 않으면 나토를 탈퇴하겠다고 위협한다. 미국 돈을 들여 인권, 자유, 민주주의 등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미국은 더 이상 없다.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 서울대 이문영 교수의 표현대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서 각자도생의 질서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아함과 정직함' '위선과 야만'의 대비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미국의 '정직한 자기고백'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더 이상 희생을 감내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는 비명이다. 2020년 3조1320억달러, 2021년 2조7700억달러, 2022년 1조3700억달러, 2024년 1조8330억달러.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규모이다. 2024년 1년간 지출한 미국 국채 이자비용만 8820억달러(약 1270조원). 2024년 한 해 미국 국방비는 8741억달러(약 1260조원). '천조국' 미국이라도 감내하기 불가능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트럼프의 구호는 미국이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는 실상을 알리는 것이다. 관세는 시작일 뿐이다. 민감국가 지정, 한미 자유무역협정 파기도 연습게임일 것이다. 우리의 대응에 달렸지만 주한미군, 한미상호방위조약, 북핵 문제 등 우려하는 일이 언제든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 내우외환의 국가적 복합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우리의 살길은 동맹이 아닌,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 엄중한 시기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미국 에너지부의 민감국가 지정만 가지고도 싸움질에 여념이 없다. 트루먼 대통령의 말대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초인을 다시 기다려야 하는지 우리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dinoh7869@fnnews.com

실시간핫클릭 이슈

많이 본 뉴스

한 컷 뉴스

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