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믿고 핵 포기 우크라에
트럼프,'굴욕적 휴전'압박
한국, 핵 잠재력 확보해야
트럼프,'굴욕적 휴전'압박
한국, 핵 잠재력 확보해야

요즘 우크라이나의 처지가 처연하다. 지난 3년간 러시아의 침공에 사력을 다해 맞선 우크라이나다. 하지만 영토를 상당 부분 빼앗기고,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그러고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미국으로부터 사실상 '굴욕적 휴전'을 강요받고 있다. 가치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 무대는 이토록 냉엄하다.
지난달 28일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백악관 설전이 이를 잘 보여준 단면도다. 젤렌스키는 "살인자(푸틴)에게 우리 영토를 양보하는 건 안 된다"며 트럼프의 일방적 대러 종전협상에 제동을 걸려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우리가 협상에서 손 떼면 당신 혼자 싸워야 하고, 결과는 끔찍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특히 "당신은 손에 쥔 카드가 없다"는 등 무례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젤렌스키는 점심도 거르고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광물협정 서명도 무산됐다. 이는 휴전협정 후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을 미국의 안전보장을 받으려고 트럼프의 제안에 울며 겨자 먹듯 응했던 카드였다. 며칠 후 그는 트럼프에게 "협상 테이블에 앉을 준비가 됐다"는 서한을 보낼 때 '약한 자의 슬픔'을 뼈저리게 곱씹었을 법하다.
이처럼 약소국의 비애를 실감케 하는 장면이 왠지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아 보인다. 6·25전쟁 때 우리도 원치 않은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휴전 압박을 받았다. 심지어 아이젠하워 정부는 '상시준비(Ever-ready) 작전'이란 이름으로 말을 듣지 않는 이승만을 축출할 계획도 세웠다. 지금 백악관에선 "러시아와 협상할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젤렌스키의 사임을 압박하는 견해가 나올 정도니 기시감마저 든다.
한국에는 우크라이나 희토류처럼 미국이 눈독 들일 만한 자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1953년 6월 미국과 협의 없이 반공포로 2만명을 석방했다. "'통일 없는 휴전' 반대"(즉 북진통일)를 내걸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원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 승부수는 통했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 조야에 동유럽에 이어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간파한 그의 혜안 덕분이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구소련에서 독립한 세계 3위 핵보유국이었다. 1994년 영토와 주권을 보장한다는 미국 등 서방의 약속을 믿고 스스로 핵을 포기했다. 그게 비극의 싹이었다. 신냉전 시대의 개막도 불운이었다. 1950년대 냉전기엔 미국의 봉쇄대상은 소련이었지만, 지금의 과녁은 중국이란 점에서다. 미어샤이머 교수가 설파한 '공격적 현실주의' 입장인 트럼프에겐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거래의 대상일 뿐이다.
우크라이나의 고립무원 신세에서 우리는 뭘 배울 건가. 무엇보다 국제분쟁이 미국에 주는 피해와 해결 시 얻을 이익이 트럼프의 최우선 관심사임을 알아야 한다. 한미 간 경제 현안에서 '관세폭탄' 등 불협화음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트럼프식 거래의 기술을 역으로 활용할 지렛대가 있다. 중국을 배제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의 제조업 역량은 미국에도 긴요하다. 특히 군함에서 LNG운반선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인 조선업이 그렇다.
미중 대치가 격화되는 가운데 한미 간 안보 엇박자가 더 걱정이다. 트럼프 1기 때도 사드 배치를 미적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수모를 당했다. 트럼프는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의 회견 발언을 통역할 필요조차 없다고 막았었다. 우리 어깨 너머로 북핵 문제가 미봉될 소지도 경계해야 한다. 완전한 북한 비핵화나 한국의 자체 핵무장이 최상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지난한 과제다. 최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트럼프에게 방위비 증액을 선제 제안해 안보이익을 챙긴 건 타산지석이다. 만일 정부가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일부 수용하는 대신 일본 수준의 핵연료 재처리권을 얻는다면? 우리도 여차하면 핵무장할 잠재력을 확보하고,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저장 문제도 해결하는 일거양득의 거래일 듯싶다.
kby777@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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