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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 고스란히 담은 조각들… 현대작품의 지향점이 되다 [K-스컬프처와 한국미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7.21 17:55

수정 2022.07.21 17:55

(2) 한국의 전통을 현대언어로
권진규 '문'
권진규 '문'
최만린 '지(地)'
최만린 '지(地)'
무념무상으로 빚어진 듯 좌우대칭이나 공교로운 손재주를 자랑하지 않는 듯한 희고 둥그스럼한 항아리, 백자 달항아리는 민족의 상징이었다. 교묘한 솜씨를 자랑하여 화려하고 찬란하기까지 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상징이 이 '흰 것'들이 된 것은 어떤 연유인가. 그것은 물론 일제강점이라는 역사적 상흔에 기인한다. 나라가 없어진 이들을 딱히 지칭할 단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강제로 국가를 빼앗긴 민족이라는 모습을 설명하는 데에는 순진무구한 흰색이야말로 딱 맞았다. 백의민족, 백자와 같은 '흰 것'들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라는 의미를 담은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전통은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전통을 지향하는 것은 장인의 태도이고 새로움을 찾는 것은 예술가의 욕망이다. 상식과 같은 이 말도 문화 콘텐츠라는 측면에서는 전적으로 옳다고 볼 수만도 없다. 기법이 곧 내용이 되기도 하는 현대미술에서 전통에 대한 탐닉은 국가를 만들어가던 근대국가의 소산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다. 민족문화 창달이 국가정책으로 펼쳐졌을 때, 단색화 같은 데서 보여지는 서예에서 온 형태는 조각 또한 비켜가지 않았다.
이들은 현대적인 재료와 결합하여 전통이라는 키워드에 충실한 현대작품의 지향점을 향하기도 한다. 전통은 정체성을 강조하는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전략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오래된 미술의 덕목인 비판의식은 작가로 하여금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로 관심을 확장시키고 종국에는 거리에서 피켓을 들거나 바리케이드를 치게도 한다. 값싸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거칠고 투박한 질감의 것들에 대한 조각의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에서는 민초에 기반한 역사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

때로는 작가의 태도에 의해 전통의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1980년대 길거리에서 진흙을 꾹꾹 눌러 만든 전통 토우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과 상여모양 대리석 판 위에 놓인 토우는 결코 같은 의미일 수 없다. 하지만 역사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비판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시간을 넘어서 삶과 죽음의 영속적인 이미지로 채용된 경우 모두 그것의 재료와 형상은 전통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유구한 순혈의 어떤 것이라고 믿는 요소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전통을 상징으로 삼는 것들에는 일종의 원칙이 있는 것 같다. 그 원칙은 작가 수만큼이나 여럿으로 보이는 세계로 진입하는 만능열쇠이다.

한창 전에 조각계에서는 우윳빛 대리석이 아닌 화강암이나 강돌, 굽어진 소나무나 오래된 폐목재들을 사용하거나 장승이나 성황당의 돌탑을 종종 원용하기도 한 한국성 되찾기 운동이 있었다. 단지 전통으로 불리던 개념이 한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지칭할 수 없는 것 혹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신호일 것이다.
불타오르는 애국심이 아니라 여러 표현 요소 중의 하나쯤으로 평정심 안에서 전통이 선택될 때, 진정한 표현 요소인 자유의 언어로서 자리잡을 것이다. 그래야 공공의 장소에서 눈에 띄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관계 없이 사람들을, 인류를 통합하는 조각의 역할을 이룰 수 있다.
조형언어는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상징을 넘어서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은정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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